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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탁월성에 따른 활동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탁월성을 따라야 할 것이다. 최고의 탁월성은 최선의 것에 대한 탁월성이다. 이것이 지성(nous)이건 다른 어떤 것이건 본성상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며, 고귀하고 신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 자체가 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신적인 것이든, 자신의 고유한 탁월성에 따르는 이것의 활동이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스 윤리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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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야에서 일이든 취미든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해당 분야에서 가장 높은 내공을 갖는다는 것은 여러 교훈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즐긴다는 것은 그 대상과 자신이 함께 하나가 되는 것으로, 지배하거나 지배당하거나 소유하는 관계가 아닌 본인과 대상이 함께 어우려져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간혹 어떤 즐거운 취미로 시작해 뛰어난 실력을 통해 마치 그 분야의 장인과 같이 그 자체가 평생의 직업으로 바뀌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당연히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 역시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름 아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에 애착을 가지는 것, 그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가요?

그 시작의 뒤엔 또 다른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된 음악가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며, 참된 정치가는 정치를 즐기는 사람이고, 즐거움은 힘의 표시다.

-아리스토텔레스


미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스스로 다가오는 미래와 손수 만들어 내는 미래가 그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미래는 이 양편으로 되어 있다.

폭풍이나 일식처럼 스스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서는 희망을 가져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냉정한 눈으로 바라다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상에 있어서는 근면한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이루어져 있는가!

-알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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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네이버 철학사전]


행위는 품성을 만드는 지배적 두구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이성에 따라 행위해야 ㅎ나다. 성격은 습관적 행위의 모자람이나 지나침으로 말미암아 파괴된다. 탁월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일이든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비겁자가 되고, 무슨 일이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뛰어들면 무모한 사람이 된다. 마찬가지로 모든 즐거움을 탐닉하면 무절제한 사람이, 즐거움을 전부 회피하면 목석같은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절제와 용기는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파괴되고 중용에 의해 보존된다.

[아리스토텔레트/니코마스 윤리학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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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선행을 받는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가 선행을 입은 사람이 선행을 행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인다.


각자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친구이니까. 따라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고귀한 것을 또 가장 좋은 것들을 할당하며, 자신의 가장 주인된 부분을 만족시키고 모든 것에 있어서 이 부분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만일 행복하다는 것이 삶과 활동 속에서 성립하고, 좋은 사람의 활동이 신실하며,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라면, 또 자기에게 고유한 것도 즐거운 것에 속한다면, 친구로서 신실한 사람들의 행위가 좋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지극히 복된 사람은 이러한 친구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스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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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화는 노여움과 관련된 중용이다. 온화한 사람은 동요가 없는 사람이며, 또 감정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이성이 명할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대상에 대해 화를 낼 시간 동안 노여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 숙고한다는 것은 사유의 일이며 숙고에 있어서 일종의 올바름이다. 잘 숙고했다는 것은 목적을 제대로 성취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로는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일 잘 숙고했다는 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면, 숙고를 잘한다는 것은 목적을 성취하는 데 따르는 올바름일 것이고, 이에 대한 참된 파악이 바로 실천적 지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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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숙고한다는 것은 사유의 일이며 숙고에 있어서 일종의 올바름이다. 잘 숙고했다는 것은 목적을 제대로 성취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로는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일 잘 숙고했다는 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면, 숙고를 잘한다는 것은 목적을 성취하는 데 따르는 올바름일 것읻고, 이데 대한 참된 파악이 바로 실천적 지혜이다.

 

 영혼이 그것에 의해 긍정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참을 인식하게 되는 것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들은 기예, 학문적 인식, 실천적 지혜, 철학적 지혜, 그리고 직관적 지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스 윤리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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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의 친애는 즐거움을 이유로 성립하는 것 같다. 그들의 친애는 즐거움에 따라 바뀌는데 그러한 즐거움의 변화는 빠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에로스 지향적이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대부분 감정에만 따른 것이며 즐거움을 이유로 성립하는 것이라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가 순식간에 헤어진다.


●가장 완전한 친애는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친애이다. 이들은 서로가 잘되기를 똑같이 바라는데,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그렇게 바라며, 또 그들은 그 자체로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해 그 친구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최고의 친구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우연한 것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이유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의 탁월성은 지속적인 것이다.

 단적으로 좋은 것은 또 단적으로 즐거운 것인데, 이것이 가장 사랑할 만한 것이다. 사랑하는 일(philein)이나 친애(philia)는 바로 이 사람들 안에서 최고이며 최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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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리스토텔레스/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플라톤의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어받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교적 상식에서 출발한다. 그리스 말기의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복잡하고 이론적인 것은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당장 고통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그저 관념적인 이야기를 해 봐야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그의 행복론을 우리의 상식에 맞추어 풀어보기로 하자. 행복감을 언제 느끼는가? 뭔가 목표로 한 일이 잘 성취되었을 때 느낀다. 시험을 잘 보려고 공부를 많이 했는데 생각대로 시험을 잘 보았다면 행복하다. 이와 같이 어떤 행위가 애초 목적한 대로 잘 성취되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모두 무언가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또 다른 어떤 것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것이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것은 바라는 대학에 입학을 하거나 원하는 직업을 잘 얻기 위함이다. 이렇듯 인간의 행위는 수단과 목적의 연쇄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연쇄체계 안에서 잘 이어가는 것, 그것이 잘 이어지면 행복인 것이다. 그런데 그 수단과 목적의 연쇄체계를 계속 올라가다 보면 궁극 목적에 달할 것이고, 그 궁극 목적에 다다르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선이다. 그렇다면 각자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최고선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최고의 행복이다. 이렇게 보면 행복이라는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다. 중간 중간 목표로 한 것을 잘 이루는 것, 활동을 잘해서 잘 이루는 것이 선(agathos)이자 행복이다.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해서 다 선이며 행복인가? 이를테면 도둑질을 계획해서 잘 이루었다면 그 또한 행복인가? 그렇지 않다. 일시적인 행복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다른 한편에서 불안감과 죄책감이 늘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것은 행복의 단계 중 가장 최하급 단계, 즉 이성적 명령이 아닌 동물적 욕망에 기초한 성취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다. 감각적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공격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의 물질적,감정적 가치를 목표로 하는 한, 서로 경쟁을 해야 한다. 감각적 욕망에 매달린다는 것은 남도 나를 향해 그런 욕망을 가지고 맞서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늘 긴장을 해야 하고 그만큼 또 불안하다. 물론 종종 그렇게 싸워서 얻는 즐거움, 쾌감이 있지만 그 사정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쾌감은 언제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시적인 만족감일 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한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을 가르치지만 무한경쟁에서 늘 이기는 사람은 없다. 살아남는 것은 대개 디기업과 재벌들일 뿐 그 안에서 개인의 삶은 끝없이 소모될 뿐이다. 그러나 달리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인의 생활을 검투사와 같은 삶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칼 때문에 죽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칼을 놓을 수도 없는 삶, 실로 불행한 삶이다.

 그러면 지속적인 즐거움, 훼손되지 않는 즐거움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욕망에 눈이 멀어 부도덕적인 일을 감행하면 일시적인 행복은 얻을 수는 있어도 종국에는 고통에 빠지기 때문에 분별 있게 모두에게 선이 되는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공동체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면 그 또한 나의 정점을 보고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서로 좋은 것이다. 이타적인 희생과 봉사만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것을 나누라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그 만큼 다른 사람에게 먼저 베풀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누가 웃는 얼굴에 침을 뱉겠는가? 그렇게 공동체에서 남과 조화를 이루는 일, 그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이루는 것이다. 새치기하지 않고 줄을 잘 서면, 잠깐 다리가 아프지만 결국을 편하고, 자리를 양보하면 몸은 좀 불편하지만 마음이 훨씬 편하다.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그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렇게 당장의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고 이성적 반성을 통해 보다 깊게 생각하고 그 깨달음에 따라 처신하면 즐거움은 더욱 커지고 깊어진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명한 '행복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행복이란 인간이 가지는 여러 기능 가운데서도 이성적 기능,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적 기능을 잘 발휘하고 발달시켜서 얻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요체이다.[행복에 이르는 지혜,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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