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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054호 '백자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54호 '백자 병(白磁 甁)'은 높이 36.2cm, 입지름 7.4cm, 바닥지름 13.5cm의 크기로 15~16세기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일대인 도마리(道馬里) 가마, 무갑리(武甲里) 가마, 우산리(牛山里) 가마 등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자 병'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병으로써 풍부하면서도 단정한 기품이 느껴지는 형태와 옅은 청색을 머금은 맑은 백자 유약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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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75호, '백자 상감 연꽃 넝쿨 무늬 대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75호, '백자 상감 연꽃 넝쿨 무늬 대접'은 높이 7.6cm, 입지름 17.5cm, 바닥지름 6.2cm의 크기의 작품으로, 고려 연질 백자의 계통을 이은 작품이다.

대접의 제작 시기는 경기도 광주의 분원 관요에서 15~1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백자 상감 연꽃 넝쿨 무늬 대접'은 조선시대 상감백자 중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데, 조선시대 상감백자가 보통 유약이 거칠고 상감 솜씨도 미숙한데 비하여 마무리가 깔끔하고 부드러운 질감 표현이 우수하고 무늬를 나타낸 기법도 아주 섬세하다.

단정한 도자기 형태에 맞게 간결고 단순하면서도 부드럽고 예리한 선으로 표현된 넝쿨 무늬는 중국 원나라 말기부터 명나라 초기에 나타난 청화 백자와 그 문양이 유사하다.

대접의 전체적인 생김새는 중국 명나라 초기 대접과 아주 닮아 있지만 상감기법이나 유약의 특징은 고려백자의 전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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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남구만 초상은 네 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네 본 모두 생김새와 양식이 같다. 보물 1484호 남구만 초상 외에 남구만이 영의정 재직 시절에 모사한 영정이 현재 경기도 용인시 파담마을에 있는 사당에 남아있다.


남구만( 南九萬, 1629~1711, 조선시대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조선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식(烒)이고, 아버지는 현령 일성(一星), 어머니는 권박(權瞨)의 딸이다.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51년(효종 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헤 가주서, 전적, 사서, 문학을 거쳐 이듬해에 정언이 되었다.

1659년 홍문록에 오르고 곧바로 교리에 임명되었다.

1684년에는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으며, 1694년 갑술옥사 때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1696년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관, 경사(經史), 문장을 일삼았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그의 작품 유명하다. 문집에는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보물 1484호 남구만 초상은 관복을 입고 앉아 있는 전신좌성으로, 사모에 서대를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를 부착한 현록색 단령을 입고 정면을 향해 앉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모는 높아지고 폭은 약간 좁아졌으며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구름과 학이 포함되어 있다.

얼굴 살결은 이전에 비해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며, 중국초상화의 형식 요소들을 받아들인 것들도 엿볼 수 있는데, 정면관, 표피 깔린 교의 족좌대 위의 팔자형 신발 등이 바로 그것으로 지적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렇게 정면관을 취한 초상화가 나타나는데,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칠, 팔분면으로 제작이 된다.

정면으로 그려진 이 초상화는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얼굴을 윤관선이 거의 없는 듯이 보여 몰골기법에 가가우며, 얼굴 전체적으로 미묘한 선염을 구사하며 높낮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그리기 가장 어려운 정면상을 소화할 정도로 초상화 기법이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점이기도 하다.

그림의 크기는 전체 224cm X 107cm, 그림 162.1 X 87.9c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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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작자 미상의 이채 초상에서 이채는 관을 쓰고 심의(深衣)-옛날 학자가 모든 공직을 떠나 있을 때 입었던 옷. 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을 그렸다.

얼굴은 짧고 묘사적인 붓질을 수없이 그려 얼굴의 굴곡과 특징을 잘 표현해냈고, 양쪽 귀는 얼굴색보다 붉은 것이 특징이며, 흰 수염의 묘사도 매우 세세하고 대담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안면의 세세한 묘사에 비해 심의에 나타난 주름은 음양을 세세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비교적 단순하고 대담한 선을 위주로 처리해 입체적 느낌은 덜하다.

하지만 얼굴의 세세한 표현과 몸체의 단순하고 대담한 표현이 주는 대조를 통해 얼굴모습을 보다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노인의 품위를 잘 나타내고 있어,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초상화 상단 양측에는 찬문이 씌어져 있는데, 화면에서 우측 상부에는 이한진(李漢鎭, 1732~1815)이 전서로 쓴 이채의 자제문이 있고, 좌측 하단에는 유한준(兪漢寯, 1760~1834)이 예서로 쓴 찬문이, 좌측 상부에는 송원(松園)이 정묘년, 순조7년(1807)에 행초로 쓴 원교노인(圓嶠老人)의 찬-그림에서의 원교노인은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아닌 원교라는 호를 사용하는 다른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 씌어져 있다.


초상화 크기: 134.3cm X 77cm(전체), 99.6cm X 58cm(그림)


이채(李采, 1745~1820)는 영조 21년에 태어나 순조 20년까지 활동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74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 휘령전 참봉에 제수되었다. 차츰 사헌부, 호조, 형조의 벼슬을 거쳐 돈녕부주부를 지냈으며, 음죽현감이 되었을 때 무고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며 가업을 계승하는데 전념했다.

그러다 1790년(정조 14)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홍릉령, 지례현감, 선산부사, 상주, 충주, 황주 목사, 익위사의 위수, 사어 등의 관직을 거쳐 호조참판, 한성좌우윤 및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게 된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화천집' 16권 8책이 전한다.


화천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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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명천흥사동종은 경기도 광주에서 출토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동종'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신라 동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는데, 종의 꼭대기에 있는 용뉴는 종을 매달기 위해 종의 맨 위에 만든 고리이고, 바로 옆의 굴뚝 처럼 생긴 음통은 음향효과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뉴(龍鈕)

범종에 쇠줄을 달아 매달기 위한 장치로 종의 가장 위쪽에 용의 형상을 한 고리.


신라 동종의 용뉴를 닮았지만 용두가 여의주를 물고 고개를 들고 있는 형태는 고려시대에 나타난 특징적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음통의 표면 역시 신라의 종처럼 5단으로 나누어 꽃무늬 장식을 하였으며, 종의 윗단과 아랫단에는 연속된 구슬무늬를 두르고 그 안에 보상당초무늬를 장식해 넣었다.

종의 몸체에는 두 개의 당좌와 비천상을 번갈아 배치했으며, 이렇게 당좌와 비천을 장식하고, 몸체에 넓은 공간을 남기는 것은 신라 이후에 나타나는 범종의 특징이다.

종의 제작시기는 몸체에 위패모양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천흥사'명천흥사동종이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주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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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627호 황남대총 북분 은잔/국립중앙박물관]


[보물 627호 황남대총 북분 은잔/국립중앙박물관]


[보물 627호 황남대총 북분 은잔/국립중앙박물관]


[보물 627호 황남대총 북분 은잔/국립중앙박물관]



보물 627호 '황남대총 북분 은잔'은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은잔으로, 신라시대 유물이다. 은잔의 겉면은 연꽃무늬로 위아래 단을 나누고 3각, 5각, 6각형의 무늬를 겼으며, 가운데에 거북이 등껍질 모양 안에 각각 노루, 새, 호랑이, 말, 뱀, 가릉빈가, 사슴, 사람 등의 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바닥은 보상화잎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그 씨방 안에는 고루려벽화에서 보이는 삼족오(三足烏)가 새겨져 있는데, 바닥 안쪽에서 바깥으로 두드려 돌출시켜 놓은 형태로 보인다.

겉면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무늬들은 모두 두드린 후 날카로운 칼 등으로 세부 무늬를 정교하게 다듬는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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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59호, 분청사기 상감 구름 용 무늬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59호, 분청사기 상감 구름 용 무늬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59호, 분청사기 상감 구름 용 무늬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59호, 분청사기 상감 구름 용 무늬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59호, 분청사기 상감 구름 용 무늬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59호 '분청사기 상감 구름 용 무늬 항아리'는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제작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형태의 항아리이다.

'분청사기 상감 구름 용 무늬 항아리'는 전체적으로 당당한 양감과 풍만함이 돋보이는 대형 항아리로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지고 몸통이 비교적 긴 형태이며, 특이하게도 바닥이 뚫려 있다.

이는 도자기 몸체를 만든 후 접시로 바닥 부분을 막아 마무리하는 중국 원대의 대형 도자기 제작 방식을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전체적으로 상감과 인화 기법-상감 기법에 속하나 문양을 찍은 후 백토를 박아 넣는 방식. 을 적절히 섞어 사용한 것 또한 특징인데, 항아리의 윗부분은 중국 원말 명초의 청화백자에 나타나는 여의두 무늬가 큼직하게 상감되어 있고, 중간 부분에는 용 무늬를, 밑부분에는 연꽃잎 무늬를 상감하였다.

태토는 밝은 회색을 띠며, 가는 균열이 있는 담청색의 투명한 분청 유약이 입혀져 있는데, 무늬, 구도, 제작기법으로 볼 때 중국의 원명의 선턱자기 특징이 반영되었지만 자유분방하고 대담성을 지닌 조선 도자기만의 특색 또한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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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풍속도첩-벼타작/국립중앙박물관]



[단원 풍속도첩-벼타작/국립중앙박물관]



[단원 풍속도첩-벼타작/국립중앙박물관]



단원 김홍도의 '단원 풍속도첩-벼타작'은 농부들이 벼를 타작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열심히 벼타작 일을 하는 농민들 한켠에 곰방대를 물고 홀로 한가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양반의 모습을 통해 신분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신분적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한 장면에 그린 그림이지만 그 속에는 심각한 대립관계는 찾아볼 수 없으며, 대립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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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신행길/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신행길/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신행길/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신행길'은 단원 김홍도(1745~1816 이후)의 <단원 풍속도첩> 중 결혼을 위해 신부의 집으로 향하는 신랑 행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굽은 언덕길을 돌아가는 화면 설정을 통해 긴 행렬을 한 화면에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맨 앞에는 청사초롱을 을 든 사내 둘(한 사내는 맨발을 한 것이 특이하다)과 바로 뒤에는 기럭아비가 앞장서 가고 있다.

또, 기럭아비 뒤쪽에 말을 끄는 사내의 모습을 통해 신랑의 집안 어른이 탄 말이 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뒤로는 백마를 탄 신랑의 모습이 보이고, 그림에서 각 인물들의 얼굴 표정이 모두 다른데, 신랑은 과하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하고 있어 이날의 기분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한다.

신랑의 뒤로는 장옷을 입고 말을 타고 따라오는 인물이 보이는데 행색을 통해 매파로 추정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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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42호 청자 음각 모란 상감 보자기 무늬 뚜껑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2호 청자 음각 모란 상감 보자기 무늬 뚜껑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2호 청자 음각 모란 상감 보자기 무늬 뚜껑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2호 청자 음각 모란 상감 보자기 무늬 뚜껑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2호 청자 음각 모란 상감 보자기 무늬 뚜껑 매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2호 청자 음각 모란 상감 보자기 무늬 뚜껑 매병/국립중앙박물관]



'청자 음각 모란 상감 보자기 무늬 뚜껑 매병'은 높이 35.4cm, 입지름 7cm, 바닥지름 15.2cm의 고려청자로 보물 342호이다.


'청자 음각 모란 상감 보자기 무늬 뚜껑 매병'의 두드러진 특징은 마치 네모난 보자기를 입구쪽에 덮어놓은 듯한 효과를 내기 위해 보자기 무늬를 상감기법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는 고려시대 매병을 사용하면서 뚜껑을 덮을 때 마찰이나 충격으로 생길 수 있는 파손을 방지하고 장식효과를 보다 높이기 위해 알맞은 크기의 수놓은 보자기를 매병 위에 덮어 사용했던 것에서 착안된 문양으로 보여진다.

상감된 보자기 문양만 보면 장식이 화려해 보이기도 하지만 상단 보자기 문양을 제외한 부분은 상감이 아닌 음각 모란 문양을 표현해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하고 단정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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