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장자'에 나오는 이상 세계 '덕이 가득한 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가장 상식적인 도가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시남(市南)에 사는 의료(宜僚)라고 하는 선생이 노(魯)나라의 주군을 만났는데, 노나라의 주군이 근심스러운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시남의 선생이 물었다. "주군께서는 근심스런 얼굴을 하고 계시니 무슨 가닭입니까?"

 노나라의 주군이 말하였다. "나는 고대의 성왕들께서 전한 도(道)를 배우고, 노나라의 옛 군주들의 유업을 닦아 왔습니다. 나는 죽은 이들의 혼령을 존중하였고 어진 사람들을 귀중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친히 실행하면서 잠시도 이로부터 벗어나거나 방치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환란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내가 근심하는 까닭입니다."

  시남 선생이 말하였다. "주군께서 환란을 없애는 방법이 너무 얕은 것입니다! 저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여우나 우아한 무늬를 가진 표범은 산 깊은 숲 속에 살며 바위 동굴에 웅크리고 쉬니 '고요하다'고 합니다. 밤에만 다니고 낮에는 가만히 있으니 '조심한다'라고 합니다. 비록 굶주리고 갈증이 나도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강과 산을 따라 먼 곳에서 먹이를 구하니 '일정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물이나 덫에 걸리는 환란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찌 저들에게 죄가 있어서이겠습니까? 저들이 지닌 가죽이 그들에게 재앙을 불러오기 때문이지요. 이제 노나라야말로 오로지 주군의 가죽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원컨대 주군께서는 일신의 욕망을 벗어 던지고 가죽을 없애 버리십시오. 마음을 깨끗이 닦고 욕심을 버리심시오. 그리고 사람 없는 들에서 노니시기를 바랍니다. 저 남쪽 월나라에는 어떤 마을이 있는데 그 이름을 '덕이 가득한 나라(健德之國)'라고 합니다. 그 마을의 백성들은 어리숙하면서도 소박하고 사사로움이 적고 욕심이 없습니다. 지을 줄은 알면서 숨길 줄을 모르고, 줄 줄을 알면서 그에 대한 보답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마땅한 것을 알지 못하고 의식을 차릴 곳을 모릅니다.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일정한 격식 없이 옮겨 다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저 대도(大道)를 따라 거닙니다. 살아서는 삶을 즐기고, 죽어서는 편안히 묻힙니다. 원컨데 군주께서는 나라를 버리고 세속의 번잡한 일을 내던지고, 도(道)가 인도하는 대로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노나라 제후가 말하였다. "나에겐 그 길이 멀고도 험하겠습니다. 또한 가는 길에는 강도 있고 산도 있는데, 나에겐 배도 수레도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시남의 선생이 말하였다. "주군께서는 '거만하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주군의 수레로 삼으시면 될 것입니다."

 노나라 주군이 말하였다. "나에겐 그 길이 아득히 멀고 게다가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동행하겠습니까? 나에게는 비축해 놓은 곡식이 없어 가다가 허기져도 먹을 것이 없을 터인데 어찌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시남 선생이 말하였다. "주군께서는 비용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가지신다면 비록 비축해 둔 양식이 없다 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주군께서 강기슭을 지나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으면 멀리까지 바라다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도가도 그것이 끝나는 곳을 알 수 없습니다. 주군을 전송하던 사람들이 모두 강기슭에서 돌아가면 주군께서는 이제야 비로소 멀리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은 늘 이런 일 저런 일에 매이게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힘써 일하는 사람은 이런저런 근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 임금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애써 일하지도 않으신 것입니다. 제가 원컨데 이런 저런 일로 주군을 매이게 하는 것을 내던져 버리고 주군을 근심하게 하는 것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홀로 도와 더불어 '대막의 나라'에서 노니시기 바랍니다. 막 배를 타고서 강을 건너 가는데, 어떤 빈 배가 와서 제배에 부딪힌다면 아무리 속이 좁은 사람이라 해도 화를 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 위에 한 사람이라도 타고 있으면 소리를 쳐서 멀리 떨어져 돌아가라고 할 것입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않고 두 번 소리쳐도 듣지 않고 세 번째로 소리를 치게 되면 반드시 욕을 해 가며 소리지를 것입니다. 앞의 경우에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의 경우에는 화를 내는 것은 앞의 경우에는 빈 배였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를 비우고 세상에 노닌다면 누가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다!"

[동양철학산책/김교빈,최종덕,김문용,전호근,김제란,김시천]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관해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생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본시 그 자체는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크라테스 같은 철인도 죽음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라고 하는 선입견적인 생각이 오히려 두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떠한 일 때문에 방해를 받고 불안감을 느낀다든지 또는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 결코 남을 탓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책망할 대상은 우리들 자신인 것이고, 그 일에 관한 우리들의 생각 탓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대 생각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일어날 테면 일어나라고 바라고 있는 편이 마음 편할 거이다. 그러면 그대는 행복할 것이다.


금전, 쾌락,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목표라는 항구를 모르는 사람에게 순풍은 불지 않는다.


신이 사람에게 하나의 혀와 두 개의 귀를 준 이유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두 배로 하라는 의미에서이다.

[에픽테토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진 공자/네이버 지식백과]

 

공자와 맹자-고대 유가 사상

1)자연과 인간의 선성

 

유가 이전의 상고시대에는 복록수(福祿壽)로 표징되는 행복한 삶과 수덕(修德)으로 표징되는 도덕적 삶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고 명목에서나 실질에서나 그 두 가지 모두가 위정자가 추구해야 할 바의 것이었다. 그러나 도덕과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적 경향이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종국에는 오로지 도덕적 삶에 충실한 삶만이 인간 본연의 자세이자 바람직한 삶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논어'나 '맹자'를 시작으로 하는 유가 계통의 문헌에서 도덕적 삶에 대한 언급은 넘쳐흘러도 행복한 삶에 대한 언급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자 내지 유가 사상이 행복한 삶을 무시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공자는 전쟁과 하극상이 끊이없이 벌어졌던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겪는 삶의 고통과 불행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수없이 목도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원인이 위정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에 있다고 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공자는 그러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했고, 왜 그것이 마땅하고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연의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우주와 사람이 갖는 본연의 모습을 밝혀 그것을 기초로 사람들 특히 위정자들을 교화하고자 힘썼고 그러한 교화에 앞장 설 지식인들을 키우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사진 맹자/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면 이러한 공자의 사상의 근간에 자리 잡은 우주 자연의 본연의 모습은 무엇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표상하는 유가적 전통은 우선 우리를 둘러싼 우주 자연을 평화롭고 생명력이 가득한 유기체로 파악한다. 사실 이것은 유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양 사상의 공통된 전제이다. 그런데 유가 사상에서 좀 독특한 것은 그러한 생명력이야말로 선한 것 중의 선한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데 유가는 우주 자연의 생명력을 어질다거나(仁) 성실하다고(誠) 표현한다. 곧 유가에게 우주 자연은 지극히 선한것, 최고선이다. 유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우주 자연의 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모습을 닮는다. 인간도 우주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속성을 보존하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자연에 깃든 생명력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 된다. 그것이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선하다.

 물론 인간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무릇 우주 자연의 품에서 태어나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마찬가지다.(이 주장에 대해서는 유가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다.) 하지만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는 본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 같은 기적 질료(氣質)가 있고, 그것에 기인하는 욕망과 감정이 있으며, 생각하고 판단하는 의식 주관, 곧 마음이 있다. 모든 존재에 동일한 것은 본질이지 기질이나 마음이 아니다. 인간과 다른 존재의 차이는 실상 이 기질과 마음에서 발생한다. 유가는 인간의 기질과 마음이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느 것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선천적 도덕성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존재, 도덕적 존재가 된다. 곧 인간은 동물과 같이 욕망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기질이 가장 깨끗하기 때문에 동물보다 순화된 욕망 및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동물은 의식 주관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반성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의식 주관이 발달했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반성하여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이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고, 저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의식 주관은 행위를 이런 방향으로도 저런 방향으로도 이끌어 갈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인간의 본질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인간의 본질을 자각하여 그 본질을 반영하는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우주 자연의 도덕성, 생명력을 살려 내는 길이고, 그를 통해서 모든 만물을 길러 내는 천지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천지와 함께 우주를 떠받치는 세 기둥(三才)이 될 수 있으며, 그 생명력이 사회적으로 전파되어 태평한 세상을 만들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영원함과 합치되어 참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행복에 이르는 지혜, 이정호]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진 장자/네이버지식백과]

 

 제물론(齊物論)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장자는 이 넓은 우주에 비교할 때 인간이란 존재는 소꼬리의 털에 붙은 벌레의 알보다도 미미한 존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우주 자연의 중심도 아니며 인간이나 들풀이나 벌레나 만물은 모두 우주를 구성하는 각기 평등한 일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의 편협한 이익과 생각만을 내세워 자연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제물(齊物) 사상이다. 그리고 인간끼리 전쟁을 벌이는 것 또한 마치 달팽이 뿔 위에 둥지를 틀고 잇는 두 나라의 싸움에 불과한 부질없고도 어처구니 없는 짓일 뿐이다. 실로 우주 자연은 얼마나 광대하고,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살아 가고 있는가.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뽐내면서 그 어리석음에 빠져 남보다 멋있고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칠 때조차 자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그 본래 모습 그대로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 우리가 집착하는 가치 또한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인간 사회에만 통용되는 가치일 뿐 우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일지라도 다가가면 도망치지 않는 새가 없고, 사람이 아무리 더럽다고 기피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좋아하는 짐승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름답고 더러운 것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나 귀하고 천함, 심지어는 살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사람들은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고 논쟁을 즐겨 하지만 그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제3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제3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주관, 곧 나름대로의 입장과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면 모든 가치 체계가 사라진다. 이쪽에서 옳은 것이 저쪽에서는 틀린 것이 될 수 있고, 이쪽에 귀한 것이 저쪽에서는 천한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겉으로만 상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으나 상대주의라는 것도 노자의 사상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말하여 사람들이 선악미추의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미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구분이 없다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인 양 집착하는 것이다. 삶의 불행은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에 사람들이 집착하는 데서 나온다.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욕망에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아야 할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노자가 예시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도덕과 지식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위적 가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무엇이 남는가. 마음속의 자유가 남는다. 집착이란 나의 욕망 체계를 일정한 목표에 얽어매는 일이다. 나의 욕망은 자유롭고자 하지만 어떤 것에 집착함으로써 그것을 얻기 위해 전욕망 체계를 재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욕망도 자유롭게 실현되지 못한다. 노자나 장자는 모두 욕심을 없앨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욕망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틀에 얽매인 욕망 체계를 파괴하라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욕망 체계를 파괴할 때 인간은 상상력이 시키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욕구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욕망을 통해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맛볼 수 있다.[행복에 이르는 지혜, 이정호]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경북영천,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

 

 우리는 지금 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식생활, 주거생활, 의복, 음악, 미술, 영화, 스포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문화의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특정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접목해 새로운 콘텐츠로 각광받기 시작하였고, 문화상품, 더 나아가 문화산업으로 까지 거론되며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까지 하다. 특히 그동안에는 박물관에나 전시가 되고, 보전에 골머리를 앓아 왔던 전통문화가 IT기술과 융합되면서 새로운 문화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랜 역사와 소중한 문화자원을 지닌 우리나라는 그만큼 양질의 문화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진 셈이다.

 

[역대흥행1위에 오른 애미메이션 '겨울왕국' 포스터]

 

 21세기는 기존의 군사나 경제보다 문화전쟁이 더 심화되면서 디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1편이 1년 동안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가 낸 이익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여들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문화전쟁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단순히 개발과 발전의 논리에 맞물려 전통문화와 문화재를 홀대하고, 전통의 정신이나 사상, 철학 등을 열등시 하고 등한시 해온 결과 우리의 많은 소중한 문화와 유산들이 사라져 왔고, 또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최근에 이런 문화산업이 각광받으면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재조명되고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그 동안 소흘하고 등한시 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어린이문화재청]

 

 이는 분명히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뿌리인 정신문화, 이를테면 우리만의 독특한 철학은 아직도 구시대의 산물로 여기지며 홀대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문화의 뿌리는 그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라도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를 진지하게 한번 더 되돌아 보고, 변화된 우리의 삶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데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말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세지를 주고 있다.

 아래는 문화와 철학에 대해 핵심적인 내용이라 소개하고자 한다.

 

 문화와 철학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문화를 넓은 범주에서 보면 종교,철학,예술,법률,풍속 같은 모든 사회현상을 포괄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정신생활 영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문화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화를 3개의 층차로 구분한 중국학자 방박의 견해에 따르면 뿌리가 되는 가장 깊은 부분에는 종교와 철학, 윤리 등이 놓여 있고, 둥치나 줄기에 해당하는 중간 부분에는 문학, 예술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잎과 열매에 해당하는 겉으로 나타나느 부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문화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민족의 문화는 그 민족의 철학에 담긴 인간관, 사회관, 자연관, 세계관, 예술관 등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문화가 중심이 되는 시대를 살면서도 오히려 그 뿌리인 철학을 가장 소흘히 대하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김교빈,이현구 '동양철학에세이', 동녘, 1993.]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