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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조국사 지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지눌의 진심(眞心) 사상 '보저전서(普照全書)

 

 번뇌와 깨달음의 동일한 근본

 지금 말하는 바는 오로지 드러난 형상(相)은 이에 매여있는 일심의 망념(妄念)이 지어낸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곧 삼계(三界)와 생사라는 병의 근본이다. 만약 우리가 무명(無明)은 생겨남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과거의 업(業)은 다 없어지고 새로운 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곧 병을 끊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한 생각의 마음이 병의 근본이며 또한 동시의 도(道)의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실제(實)에 집착하면 그르치게 되고, 공(空)임을 깨달으면 잘못이 없게 된다. 따라서 깨달음은 한마음의 한순간에 있으며, 거기에는 앞뒤가 없다. 이러하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깊이 헤아려서 분명하게 결정을 내리면 이치에 도달함이 매우 가깝게 되기 때문에 비록 말세의 중생일지라도 그 마음이 넓고 큰 자는 역시 마음을 비워 스스로 비추어볼 수 있고, 한 생각의 연기가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아직 깨달음을 확인할 수는 없을지라도 도에 들어가는 기본이다.(152쪽)

 

 올바른 수행방법

 질문: 중생의 업과(業果)인 종자(種子)와 그 종자의 현행(現行)이 여러 겁 동안 훈습해 온 것이 마치 아교풀이나 옻칠과도 같이 단단히 덮여 있는데, 어떻게 단지 일심을 깨달은 것만으로 금방 그것을 끊어 버리고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대답: 만약 그대가 마음(心)과 대상 존재(境)가 실재한다고 집착하고 주관 존재(人)와 객관 존재(法)가 공(空)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오랜 겁 동안 수행하더라도 결국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무아(無我)를 금방 이해하고 사물의 무실체성을 깊이 통찰할 수 있다면 주관과 객관이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니, 확증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센 바람이 날리는 먼지처럼, 급류에 떠내려가는 가벼운 배처럼 쉽게 금방 성취할 수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대들이 일심을 믿지 않고 스스로 어려움과 장애를 만드는 점이다.

 또 "어째서 번뇌를 끊을 필요가 없는가?"라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만약 살생이나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거짓말이 다 일심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처하는 곳마다 문득 고요하게 될 것이니, 다시 끊어야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심을 이해하기만 하면 온갖 존재는 저절로 환영처럼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이미 형태가 없으니, 법이 어찌 형상을 갖겠는가? 종밀의 '법집별행록'에 설명된 단혹(斷惑)의 뜻에 따르면, 본성(性)과 형상(相)이 함께 비추인다. 이것이 '끊음이 없는 끊음'이다. 끊어도 끊음이 없는 것이 진정한 끊음이다.(152~153쪽)

 

 진심(眞心)과 체용의 불이(不二)

 진심(眞心)의 묘한 본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고, 편안하고 고요하며, 참되고 일정하다. 이 참된 본체 위에 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그 묘함을 얻는 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사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음은 온갖 경계를 따라 구르니, 구르는 곳마다 진실로 신비롭다. 흐름을 따르면서 그 본성을 알아차리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

 그러므로 움직이고 걸을 때나, 밥을 먹고 옷을 입을 때나,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놀릴 때나, 왼쪽을 돌아보다가 오른쪽을 엿볼 때나, 그 어느 때나 다 진심의 묘한 작용의 나타남이다. 범부들은 미혹되고 혼동되어서,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는다고 생각만 하고, 밥을 먹을 때는 단지 밥을 먹는다는 생각만 하여, 무슨 일을 할 때나 항상 단지 드라난 모습만을 따라 전전한다. 그러므로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속에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어도 알지 못한다. 만약 그 본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작용하는 중에 있어서 결코 어둡거나 잊어버리지 않는다. [진심직설(眞心直說],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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