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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주자가례의 혼인절차는 대체로 그대로 이 땅에 정착되었다. 그런데 혼인에서 장작 중요한 문제는 혼례를 치르기까지의 세부적인 절차보다는 결혼 후에 부부가 어느 곳에서 살림을 시작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을 인류학에서는 거주규정(rule of residence)이라 하는데, 남자 쪽 집에 거주하는 것을 부처제(父處制), 여자 쪽 집에 거주하는 것을 모처제(母處制), 외삼촌 집에 거주하는 것을 외숙처제(外叔處制), 독립된 곳에 거주하는 것을 신처제(新處制)라고 한다.


기산풍속도첩 '장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국의 친영제는 전형적인 부처제이지만 우리나라 풍속은 그렇지 않았다. 신랑이 처가 ㅉ고에 들어가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모처제가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입장(入丈)' 또는 '입장가(入丈家)'라 하였다. 글자 그대로 장인 집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 말은 지금까지도 '장가든다'는 말로 남아 있다. 그리고 장가드는 혼인을 사위가 아내 집에 머물러 산다 하여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고 불렀다.


이 풍속은 유래가 아주 오랜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구려 풍속에 신랑 집과 신부 집에서 미리 약속이 이루어지면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는 엎드려 절하면서 따님과 자고 싶다고 두세 번 하면 신부의 부모가 신랑을 자기 집에 들어가 살게 하는데, 집 담장 안 뒤쪽에 사위집(서옥 壻屋)이라는 작은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신부를 맞이할 때에 신부대(新婦貸)를 지불하지 않고 노역(勞役)으로 대신하는 봉사혼(奉仕婚: Service Marriage) 또는 노역혼(勞役婚)의 흔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봉사혼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스라엘의 야곱이 외삼촌의 딸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 동안 외삼촌의 집에서 일을 해야 했다는 '구약성경-창세기'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서류부가혼의 풍속에 따라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처가살이를 했고 아이들은 외가에서 성장했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 1389~1456)는 맏아들이면서도 처가살이를 했고,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고향이 제각각이었으며,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강를 외가에서 장장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처가살이 풍속 때문이다. 그래서 성종 때 예종 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의 동생 한환(韓懽)이 장인을 때리고 욕한 일에 대한 처벌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우찬성 손순효가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친영하는 예(禮)가 없어 모두 처가를 '집'이라고 하고 처부(妻父)를 '아버지'라 하고 처모(妻母)를 '어머니'라 하여 부모로 섬기니" 중국의 법보다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가에서도 사위를 거의 자식과 같이 대우했다. 그래서 11세기 고려 문종 때에 공음전(功蔭田, 고려시대 5품 이상 관리에게 주어지던 토지로 자손에게 상속 가능한 토지)의 상속순위에서 사위는 아들 다음이었으며, 지방 향리의 자제를 기인(基人)으로 개경에 올려 보낼 때에도 순위는 아들, 손자, 사위, 아우, 조카의 순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러한 풍속을 곱게 보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 집에서 사는 것은 양(陽)이 음(陰)을 따르는 것으로 하늘의 도(道)에 맞지 않는 야만적인 풍속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1435년(세종 17)에 친영제에 따라 혼인하는 예법을 반포하고 그해에 태조의 서녀(庶女) 숙신옹주(淑愼翁主, ? ~ 1453년)를 파원군 윤평(尹泙)에게 시집보낼 때에 친영례를 행했는데, 그것이 조선에서 처음으로 행한 친영례였다.


기산풍속도첩 '시집가는 모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나라에서 아무리 강권해도 일반백성들의 풍속은 변하지 않았고, 이는 양반관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친영례와 서류뷰가혼의 풍속을 절충한 반친영(半親迎)이 등장했다. 


16세기 중종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반친영이란, 말 그대로 온전한 친영이 아니라 서류부가혼과 절충한 반쪽짜리 친영이다. 그런데 반친영이 어떤 혼인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혼례식 절차야 어찌 되었든 어느집에서 부부가 결혼생활을 시작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최근까지 남아 있는 혼례습속을 보면 일정 기간 신부가 자신의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는 것을 초행(初行)이라 하는데, 혼례식만 치르고 신부는 그대로 자신의 집에서 살고 신랑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가끔 신부 집에 재행(再行)을 오는 경우도 있고, 신부 집에 일정 기간 살다가 예전 자기 집으로 신부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 기간이 1년인 경우는 해묵이, 1개월인 경우는 달묵이라 하였다. 신부가 집에 사흘 동안 있은 후에 3일 만에 시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3일우귀(三日宇歸)라 하였는데, 우귀란,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혼인풍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지역에 딸, 시대에 다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을 짐작케 한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일반적이었던 여러 가지 제도, 예컨대 자녀들이 아들딸 구분 없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부모의 제사를 지냈던 윤회봉사(輪回奉祀) 제도나, 아들딸 구분 없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던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 제도는 우리나라와 베트남에만 있었던 독특한 제도인데, 그것들은 모두 서류부가혼이 바탕이 되어 형성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이런 풍속들이 차츰 변했다. 혼례는 비록 여자 집에서 치르더라도 살림은 남자 집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바뀌어, 남자가 '장가드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시집가는' 풍속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사위도 처가를 예전보다 멀리하게 되어 "처갓집 세배는 애두꽃 꺾어 가지고 간다"는 속담이 생기기도 했다. 4월 중순에나 피는 앵두꽃을 꺾어 세배 간다는 것은 처가를 소중이 여기지 않아 세배를 미루고 미룬다는 뜻이다. 처가에서도 예전에는 '반자식'으로 여겼던 사위를 이제는 점차 '백년손님'으로 여기게 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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