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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흡연에 관한 한 절대적 지지를 표했지만 술꾼한테는 그다지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술 몇 잔 덕분에 진실을 보는 눈을 얻게 된다는 생각을 영 못마땅해했다.

 

술은 인생이라는 수술 과정을 견디게 해주는 마취제다.
-조지 버나드 쇼(Geroge Bernard Shaw)

하지만 그게 우리들 모습 아닌가. 술 몇 잔에 우리는 불현듯 눈이 밝아진다. '자, 이제 단념할 때다.' '난 여자 친구를 정말정말 사랑해. 그러니까 곡 결혼해야겠어.' '나랑 가장 친한 친구가 빌어먹을 녀석이야. 그 사실을 알게 해줄 필요가 있다.' 

'발리로 이사 가서 바닷가 마을에 살 때가 됐어.' 술을 마시면 이처럼 결심이 또렷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감정은 항상 위험했다. 술의 힘을 빌리면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낼 수 있고, 자신의 궁극적 목표에 완벽히 부합하는 듯한 마법 같은 새벽 두 시의 전화 통화도 할 수 있고, 원하는 시간 언제든 비행기표를 예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확실하고 명료한 순간에 벌인 일인데도 그것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적이 숱하게 많다. 우리가 감상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생각이 있다. 술 취한 자아야말로 진정한 우리 모습이라는 생각, 술이 없었다면 다다르지 못했을 자아의 본질이 바로 술 취한 자아 속에 고이 웅크리고 있다는 생각.

 

하지만 러셀은 이런 생각은 그저 게으른 사고방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내놓은 몇 가지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있는 그대로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술에 취했을 때 다른 모습이 된다면 그건 잠잘 때의 우리 상태처럼 '진짜' 모습이 아니다. "약해진 순간이야말로 강건할 때보다 더 나은 통찰력을 부여한다는 가정은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러셀은 이렇게 일갈한다. 술에 취하면 자기 무의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무의식의 소리를 듣는 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무의식이 소리를 빽빽 지르는 순간은 그리 소중하지 않다. '케밥 먹고 싶어', '여자 친구한테 키스하고 싶다', '너, 운전해도 괜찮아', '그 남자가 널 같잖게 쳐다보고 있어', '걔는 뭐가 문제라니?' 이런 무의식은 그다지 중요한 얘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무의식과 우리 삶을 통합시키는 이성적 사고와 운동 기능이 있다. 이런 능력이 유효한 경우에는 우리 무의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와인 한 잔 마시고 어김없이 눈물을 터뜨린다면 우리 요구와 욕망을 삶과 통합시켜야 하는 책임을 나 몰라라 회피하는 꼴이 된다. "합리적인 순간과 비합리적인 순간이 교대로 나타나는 것에 절대 만족해서는 안 된다." 러셀의 간명한 당부다.

 

물론 지키기 쉬운 말은 아니다. 우리는 의식적 욕망의 뚜껑을 꼭 닫아두는 데 아주 능숙하다.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은 쓸데없는 것일 수도 있다. 술이 취했을 때 피에로와 싸우고 싶어진다면 무의식의 말을 듣고 술이 깬 후 서커스장에 가서 피에로와 한판 붙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피에로들이 서로 똘똘 뭉쳐 그 큰 신발로 반격할 경우 기겁할 고통을 겪을 수도 있으니 부디 싸움은 벌이지 않는 게 좋다. 통홥하라는 말은 무의식의 명령을 경청하라는 게 아니라 무의식을 훈련시키라는 뜻이다. 러셀은 우리 모두 훈련과 자기반성을 통해 무의식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무의식 훈련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면 카운슬러나 그룹 치료, 인지행동 치료 같은 게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끝없이 불행하고 정신 사나운 속수무책의 술꾼인 경우, 다시 술에 취한다고 고통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값비싼 죽음을 치를 도리밖에 없다. 아마 러셀은 비범한 본인에 비해 재능이 덜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무의식 훈련에서 겪을 문제를 과소평가한 것 같다. 그렇지만 러셀이 우리에게 "자존심을 잃고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한 말은 전적으로 옳다. 무의식 훈련이 아무리 어려워도 자존심 지키기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작 술 때문에 자존심을 잃기는 너무 억울하고 께름칙하다.

 

술을 마실 때 감정이 과해지는 건 무의식 속의 생각이 우리 스스로의 저항력을 뚫고 나아가려고 몸부림친다는 뜻이다. 어떤 것도 숨기거나 억누르지 않는 솔직한 일기를 써보라. 자기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생각을 뚜렷하게 정리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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