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뢰즈<마을의 신부 L'Accordee de village> 1761년작품
(여성과 문화)
18세기 프랑스 살롱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해 볼 수 있을까?
※살롱(사교계):살롱(Salon)은 프랑스에서 궁정이나 귀족의 저택을 무대로 한 사교계를 뜻한다.
데팡 후작 부인과 레스피나스 양은 살롱 여성의 삶에 내포된 미묘한 국면을 잘 보여 준다. 어려서부터 명민했던 데팡 부인은 광포했던 남편과의 결혼 생활로 고통을 겪었지만, 남편의 죽음과 함께 물려받은 유산을 바탕으로 살롱 여성으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데팡 부인은 상당한 성공과 도락에도 불구하고 권태라는 인생의 적에 압도되어, 그 하소연으로 주변 사람들까지 권태롭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과도한 독서는 54세의 그녀에게서 시력을 앗아 갔다. 이 무렵 데팡 부인의 수행 여성(dame de compagnie)이 되었던 젊고 감수성이 예민한 쥘리 드 레스피나스는 그녀에게 인생의 활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이 두 여성은 결국 문인이라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경쟁하면서 불화하고 결별하게 되었다. 레스피나스 양의 감수성은 문인들의 호감을 샀지만, 그들과 데팡 부인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데팡 부인의 오랜 친구였던 달랑베르(d'Alembert) 등의 백과전서파와 중농주의자들이 레스피나스의 새로운 살롱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데팡 부인은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친구들을 잃는 인간적인 불행을 감내해야 했지만, 이후 월폴(Walpole)과 볼테르와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당시의 문학과 그 주변 인물, 심지어는 자신에 대해서까지 명철하고 세련된 분석에 몰두했다.
데팡 [Marie de Vichy-Chamrond, marquise du Deffand]/프랑스 작가/사진:다음백과사전
많은 남성 문인 친구들의 추종과 찬사, 당국의 후원으로 재정적인 독립을 확보하여 성공적인 살롱 여성으로 입신한 레스피나스 양은 행복했을까?
그녀 역시 남성들에 의해 규정된 역할을 수행하는 속에서 내면적인 자아 상실로 고통 받았던 사례를 보여 준다. 개인적으로 그녀는 사생아라는 출생의 약점, 폐 질환과 지극히 예민한 감수성을 운명적으로 감내하면서 절망감에 시달렸다. 또한 남성 문인 친구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한 살롱에서의 바쁜 일정으로 사적인 세계를 돌볼 여유를 빼앗긴 채, 날카로운 감수성에 상처를 입고 끊임 없는 신경불안에 고통스러워했다. 서신 교환이라는단편적이고 유동적인 형태의 글쓰기를 통해 사랑과 속 깊은 감정의 흐름, 그리고 불행한 영혼의 고통을 진정으로 토로하는 것이 그녀의 행복을 위한 유일한 통로였다. 그녀가 1773년 부터 1776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인 귀베르에게 쓴 편지에는 출구 없는 존재의 고통스러운 자기직면과 절망이 지극히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레스피나스 양은 옛 연인 모라 백작에 대한 은밀한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이는 소통되기 어려웠던 그녀의 복잡한 내면에 대해서 암시해준다.
부르주아 여성인 조프랭 부인은 가장 성공적이었던 살롱 여성의 사례이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이미 부유하고 안락했지만, 남편의 죽음으로 얻은 시간과 재정적인 여유를 바탕으로 새롭게 시작한 살롱 여성으로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더 큰 보람을 제공했다. 그녀의 살롱은 파리를 찾는 각국 여행자들이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할 국제적인 장소로서 명성을 누렸다. 그녀는 사상가 및 정치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까지 했다. 스타니슬라스포니아토프스키 백작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훗날 그는 폴란드의왕이 되었고, 조프랭 부인은 6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궁정으로 초대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네케르 부인은 다른 살롱들과의 경쟁을 피해 섬세한 예법과 철저한 준비로 성공적인 살롱 운영을 하면서 남편의 경력에 일조했다. 총명했던 그녀의 딸 제르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살롱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성장해서는 살롱의 꽃이 되었다. 살롱에서의 활동은 결혼하여 스탈(Stael) 부인이 된 뒤에도 지속되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소설책에 "여성에게 영광이란 그저 행복의 상실을 가리기 위한 현란한 장례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