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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발효음식, 김치! 우리나라 식탁이라면 빠질 수 없는 김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어디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역사속 김치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김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다. 삼국지 위서 30권에 동이전(東夷傳) 중 고구려 편에 나타나는데-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은 비록 중국측의 기록이지만 고대사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우리민족의 고대사를 연구할 때 귀중한 사료 중 하나로써 동이(東夷) 즉,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왜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내용을 보면 "고구려인은 술 빚기,장 담그기, 젓갈 등의 발효음식을 매우 잘한다" 고 기록돼 있다. 이는 이미 이 시기에 저장발효식품이 보편화 되고 생활화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언제부터 김치를 만들어 먹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김치를 주로 '저(菹)'로 표기했으며 그밖에도 여러가지 한자어가 사용되었다. 침채(沈菜), 염채(鹽菜), 함채(鹹菜), 엄채(醃菜), 저채( 菹菜), 침저(沈菹), 침지(沈漬) 등이 그것이다.

 김치를 뜻하는 낱말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10세기 고려시대이다. 즉 983년(성종 2년)에 환구(圜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 차려 놓는 음식 가운데 미나리김치[근저(芹菹)], 죽순김치[순저(筍菹)], 순무김치[청저(菁菹)], 부추김치[구저(韭菹)] 등이 보이는데, 이것들이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으로 분명히 보이는 김치이다.

 하지만 10세기에 처음으로 김치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10세기 전에, 오래전부터 김치를 만들어 먹었는데 지금까지 남은 기록에 그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김치를 '저(菹)'로 기록하여, 오이를 깎아 절여서 만든 '저(菹)'가 '시경'에  처음으로 보인다. 그때의 저는 공자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먹었다는 것으로 보아 오이를 시큼하게 절인 것으로서, 아마도 지금의 오이피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8세기의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의 문서에 제조방법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된 '츠케(漬)'가 등장한다. 그것은 김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김치를 '츠케모노(漬物)'라고 부른다.

 중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김치가 있었고, 6세기에 편찬된 '제민요술( 濟民要述)'이라는 책에 김치 제조법이 소개되어 있으며, 일본에도 8세기에 김치가 있었으므로, 중국과 일본의 문화적 가교 역할을 했던 한반도에도 일본에 김치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김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정창원 문서에 수수보리지(須須保理漬)라는 순무김치 만드는 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수수보리는 일본에 누룩으로 술 만드는 법을 알려 준 백제사람 이름이므로 그 순무김치도 백제에서 제조법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치가 수천 년 전부터 중국에 있었고 8세기 일본의 기록에 김치가 등장하므로 우리나라에도 김치가 그 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김치는 꼭 다른 나라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도 있다.

 김치의 종류가 수백 가지가 넘는다는 말도 있듯이, 어떤 채소든 절여서 먹을 수만 있다면 김치가 될 수 있다. 음식물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에 생선은 바닷가에서나 구할 수 있고, 고기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먹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은 곡식과 채소였다. 그런데 김치의 재료는 꼭 밭에서 나는 채소뿐이 아니었다. 고려 말의 시에도 여뀌풀에 마름을 넣어 소금에 절였다는 말이 있듯이 야생초도 절여 먹으면 김치가 된다.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 진휼식품으로 나누어 주었던 것이 쌀, 콩, 장, 미역국이었는데, 장을 나누어준 것은 야생초를 그냥 먹으면 탈이 나기 때문에 장으로 조리를 해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결국 김치는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음식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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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의 주요내용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약화된 한국불교의 부흥을 위해 한국불교 개혁과 민중불교를 주창한 한용운의 저서, 1913년 백담사에서 집필, 발행


[사진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한국민족문화 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교육을 통한 유신 주체의 확립:

만해는 승가 개혁을 통하여 앞으로 불교의 유신을 이끌어 나아갈 주체상을 확립한다. 만해는 주로 교과 과정에 대한 개혁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당시의 승가 교육에 일반 상식적 지식이 전무함으로 해서 승려들이 지나치게 무지하다고 본다. 만해가 주장하는 교육 개혁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된 승가에게 사회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우선 승려들이 역사적 상황에 적극 대처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일반상식적 학문인 보통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생산을 통한 승려의 인권 회복:

만해는 한말 승려가 성직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천시받는 것은 승려가 생산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적극적으로 경제 활동을 하고 보살행도보다 적극적인 방면으로 실천할 것을 주장한다.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산 활동을 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복지 사업과 같은 행동을 통해 회향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3) 승려의 결혼:

만해는 승려의 결혼 문제도 언급하였다. 당시 승려들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지도 않으며 또 주지를 비롯한 부유한 승려들을 중심으로 축첩이 알게 모르게 횡행하고 있었다. 만해의 의도는 이것을 비공식적으로 숨어서 할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합법화하여 떳떳하게 행동한다면 오히려 포교에도 좋고, 독신이 싫어서 절을 떠나는 승려들의 환속 현상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4) 사원행정의 개혁과 교단의 조직화:

만해에게 있어 불교의 궁극적 목표점은 민중 불교이다. 그러기 위해서 억불 시대에 산으로 쫓겨갔던 사찰을 다시 도심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찰이 도심으로 내려와야 하는 이유가 민중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서이지만 산이라는 곳이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진보의 사상이 없어지는 것, 모험적인 사상이 없는 것, 구세의 사상이 없는 것, 경쟁하는 사상이 없는 것이다.


5) 선거를 통한 주지의 선출과 경쟁적 동기 부여:

만해는 사찰 행정의 총수인 주지에 큰 책임과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한 사찰의 운명이 주지의 손에 달렸으므로 대중적 풍모와 지도력을 갖춘 스님을 주지로 선출하기 위해서는 그 결정권을 대중에게 부여하여 대중의 선택에 맡기고자 하는 것이 만해의 주장이다. 그래서 한 사찰의 성쇠를 좌우하는 주지 선출을 대중의 손에 의해 뽑는 선거 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6) 신앙의 통일과 미신의 배격:

만해는 절에서 신봉하는 각종 소회의 철폐를 주장했다. 불교 신앙에 있어서 미신적 요소와 신앙에 혼선을 초래하는 상황을 일소하고 불교를 보다 부처님의 근본적 가르침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각종 미신적 소회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 염불당의 폐지와 참 염불의 실천:

만해는 입으로 하는 염불로 극락에 왕생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염불당(念佛堂)의 폐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의 마련을 위해 두 가지 측면에서 정토론(淨土論)을 반박한다. 즉, 하나는 화엄사상에 의한 교리적 비판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緣起法)에 의한 비판이 그것이다.


8) 불교 의식의 통일과 간소화:

만해는 복잡한 의식을 통폐합하여 간소화함으로써 불교를 제사주의적 관행(祭祀主義的 慣行)으로 부터 구하려고 했다. 신앙적 측면에서 본다면 소회의 폐지와 염불당의 폐지, 그리고 의식의 통폐합은 결국 불교의 이지성을 회복하자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해는 부처를 재공양의 대상으로 모시는 것을 반대한다. 만해는 불교를 제사주의적 관행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근본적 교리에 입각한 이성적 불교로 환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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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과학이 무엇인지 간단히 알아보자. 과학은 검증 가능성이란 최고의 기준을 만족해야 하지만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 검증 가능성의 폭을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수준에서 참(true)으로 검증 가능했던 사실도 나중에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다. 과학은 그 점을 두려워하는 폐쇄된 것이 아니라 열린 창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과학은 현재 수준의 검증 가능성에 매달려 있다.

 예를 들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전역학은 더 이상 물리학의 주역이 될 수 없으며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 등이 과학적 사실의 주역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을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즉, 현대과학의 자연관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전적인 의미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결정론을 통해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마땅히 비판되어야 한다. 이렇듯 현대 물리학은 고전 물리학의 대상인 화석화 되어 고립된 대상을 다루는 학적 체계에서 많은 부분 벗어나 있다.

 현대 자연과학의 대상은 요소들의 계량적 합으로서의 닫혀진 전체가 아니라 자기 창조적인 열려진 전체이다. 열려진 전체 속에서 개체들의 현상은 끝없는 무질서로 보일 수 있지만 그들 안에는 내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 내재적 질서의 경험적 발견이 곧 숨겨진 변수이며, 이로부터 자연의 인과성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과율은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으며, 항상 자연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기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바로 이러한 열린 과학의 입장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는 기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기본적인 접근방법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에 접근하는 과학적 방식은 기존의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존재론적 의미에서 기 혹은 인식론적 의미에서 기의 현산은 모두 물리적인 존재 혹은 현상으로 환원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으며, 그렇게 환원되지 않으면 기와 기의 현상은 관념에 지날 뿐이라는 입장이다. 강하게 말한다면 물리적으로 환원 가능할 경우에만 가의 현상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검증될 것이며, 현실의 기술적인 문제로만 안 되지, 원리적으로 그리고 미래의 기술력을 통해 검증 가능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셋째, 불가지론의 입장이다. 원리적으로는 환원되어야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환원적 방법에 의존한 과학기술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기는 기계론적이고 환원적인 과학방법론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혈의 위치와 운동의 흐름을 림프구와 림프선 그리고 전자기이론 등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기를 자연과학적으로 검증한 셈이다. 한때 북한의 김봉한은 양의사로서 기를 자연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김봉한은 1960년대 초 경락의 흐름과 흐름의 실체를 당시 최고의 과학 측정장비를 동원하여 검증하려고 했고, 이를 봉한액 및 봉한소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이 이론은 당시 소비에트와 일본 학자에 의해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었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 정권에 의해 알지 못할 이유로 김봉한이 숙청당하면서 그의 연구는 단절되었다.

 김봉한은 동위원소 p32를 고전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경락의 위치에 투입하여 경락을 통한 기의 흐름을 나름대로 해명하였다. 그는 전통 침술과 자연과학을 접목시켰으나 무작정 서구 과학방법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고유의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 주요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임파선이나 압통점과 같은 물리적 차원의 신체 지도 이론이 아닌 영위론(營衛論), 상한론에 근거한 장부론, 변증논치(辨證論治)의 고유 방법론에 의해 봉한소체 이론을 제시하였다. 물론 현재는 김봉한 봉한소체는 신경 말단의 감각수용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부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해부학적 감각수용기로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모종의 존재를 열린 과학으로 접근하려 했다는 점에서 김봉한 연구는 재평가될 만하다.

[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눙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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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충북 괴산군 불정면 달천(달래강)/두산백과사전]



달래강(고개)전설
충주의 한 산골에 부모를 여의고 의좋게 살아가는 오누이가 있었다.
오누이는 산에서 생산한 여러 식물과 땔감 등을 장날에 내다팔아 살았다.
하루는 오누이가 장에 다녀오는데,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억수처럼 퍼부었다.
늘 건너다니넌 달래강에 물이 불어 건너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남동생이 누이를 등에 업고 달래강을 어렵게 건넜다.
그런데 비에 흠뻑 젖은 누이의 탐스런 몸을 보고 그만 동생이 잠깐 이상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길을 가다가 정신을 차린 동생이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하며 누이를 먼저 가라했다.
동생이 따라오지 않자 누이가 되돌아가 동생을 찾았다.
동생은 죄의식 때문에 바위 아래에서 돌로 자신의 음경을 내리쳐 자결하고 말았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알아챈 누이가 죽은 동생을 안고 "죽기는 왜 죽어, 한번 말이나 해보지. 달래나 보지."하면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이후로 그 강을 달래강(達川)이라고 한다.
[전설속 달래강(달천)은 충북 괴산읍과 충주시를 흐르는 하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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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주 오릉(五陵)/네이버지식백과]


 신라시조 혁거세왕의 죽음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이레 후에야 유해가 흩어져서 땅 위로 떨어졌고 왕후 역시 작고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합해서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더니 큰 뱀이 쫓아다니면서 금(禁)하므로 다섯 부분을 다 각각 장사 지내어 다섯 능으로 되었다. 또 사릉(蛇陵)이라고 부르니 담엄사 왕릉이 바로 그것이다.[삼국유사/권1 기이 신라시조 혁거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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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생활문화-수저

 식사도구로 유렵에서는 실버웨어(silverware)라 일컫는 나이프, 스푼, 포트를 사용하고, 아시아에서는 젓가락을 사용하며, 나머지는 맨손을 사용하는데, 이 세 부류가 거의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화권 안에 있으면서도 특이하게 숟가락을 함께 사용한다.

 

[사진 조선시대 백동, 청동 수저/온양민속박물관/한국학중앙연구원]

 

 젓가락은 편리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사용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숙련이 필요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숟가락보다 뒤에 고안되어 함께 사용되었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에 이미 젓가락이 사용되었고, 한대(漢代) 마왕퇴(馬王堆)의 고분에서 수저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일본에서도 나라, 헤이안시대에 수저가 함께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령왕릉에서 독특한 모양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함께 발굴되었다.

 

[사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수저/국립공주박물관/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13,14세기쯤에 이르러서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숟가락이 사용되지 않고 젓가락만이 사용되었다. 숟가락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용도로 쓰일 뿐 식사 때 항상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중국, 일본, 조선의 사신들이 숟가락을 쓰고 안 쓰는 것을 서로 신기해 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도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사용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도 숟가락을 쓰고 있는 것은 우리 상차림의 특성 때문이다. 우리의 상차림에는 항상 국이 따른다. 중국이나 일본에도 국이 있지만 우리의 국과는 내용이 달랐다. 예전 중국의 국은 채소를 삶아 젓가락으로 건더기를 건져 먹는 국이었고, 일본의 미소시루는 손으로 그릇을 들고 마시는 국이다. 그러나 우리의 국은 매우 다양하고, 그 가운데는 여러 가지 건더기가 들어 있어 건더기와 함께 떠 먹는 것이 많다. 미역국, 된장국 등 대개의 국이 그러하다. 또, 우리의 것은 뜨거운 국이 많아 국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실 수가 없다. 먼저 숟가락에 떠서 식히는 과정을 거쳐 조금씩 먹어야 했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는 밥을 국에 말아 먹고 물에 말아 먹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국밥이 있는데, 국과 밥이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밥이 국에 말아져 나온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보이듯이, 이런 국밥을 먹으려면 반드시 숟가락이 필요했다.

 결국 언제나 상차림에 빠지지 않는 국이 있고, 또 그 국이 대개 뜨거웠기 때문에 숟가락을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송찬섭,전경목,정연식,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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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훈은 무엇이고, 왜 만드는 것일까?

 가훈(家訓)이란 집안어른이 자녀 또는 후손들에게 주는 가르침, 교훈을 일컫는다. 가훈은 집안을 어떻게 경영해야 다음 세대에서도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정체였고, '가정교육의 텍스트'였다. 전통사회에서 가정은 사회생활의 기본으로, 가훈을 통한 가정교육을 가문 전통의 유지, 존속, 명예를 담보할 중요한 구실을 삼았다. 가훈은 대체로 수신제가(修身 齊家), 즉 처세와 때로는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치인(治人)의 도리를 중심으로 생활문화 전반에 걸친 규범과 지침들을 간단명료하게 조목으로 나열, 정리한 것이 일반적이다.

 가훈서는 각 집안의 환경과 배경, 사회적 지위와 고유한 경험의 토대 위에서 실제적인 삶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 작성형태 등에서도 차이가 나게 마련이며, 특히 가훈을 편찬한 인물의 평생 경험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가훈이 없는 집안이 거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었고, 이름있는 가문들은 가문의 전통으로 선조의 유훈(遺訓)과 가훈을 특화, 전승하였다. 예컨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김유신(金 庾信) 집안의 '충효', 최영(崔瑩) 집안의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신의,지조,청백,성실,우애', 김굉필(金宏弼)의 '인륜(人倫)', 이언적(李彦迪)의 '근검과 절약', 이이(李珥)'의 '화목과 우애' 등은 오랫동안 그들 집안의 생활신조이다.

 이렇게 가훈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구전으로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 많고, 오늘날의 가훈처럼 간단한 명구로 작성된 것도 있다.

 

[사진 풍천노씨가학십도-도식으로된 풍천노씨의 가훈/네이버]


 가훈의 종류와 형태

 가훈은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예를 들어 가정의 규범이라는 의미로 정훈(庭 訓), 가범( 家範), 가규(家規), 가헌(家憲), 가의(家儀), 가학(家學), 가법(家法)이라고도 불리며, 자손에게 내리는 교훈, 계시라는 뜻에서 유훈(遺訓), 유서(遺書), 유명(遺命), 가계(家戒), 유계(戒), 훈자(訓子), 계자서(書) 등으로 불린다.

 대상은 아들, 딸, 손자 등으로 구체적인 대상을 명시한 경우도 있고, 대상을 명시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역시 가훈이라면 협의의 대상범위는 자녀와 친족(당내지친)이었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모든 후손이 규범으로 삼는 교육서로 활용되기도 한다.

 가훈서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은 서간(書簡), 문답(問答), 유훈(遺訓) 등의 형식이며, 17세기 이후가 되면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체계를 갖추어 편찬된 가훈들이 나타난다. 서간은 부모가 생전에 자손들에게 준 일상생활의 가르침이나 언행에 대한 훈계를 사후에 기록하여 가훈서로 삼은 경우이다. 문답은 각 가정에서 학문, 독서의 중요성, 독서방법, 인물관 등에 대한 문답을 엮어 가훈으로 전해 준 경우이고, 유훈은 성현의 격언을 기초로 유언, 유서로 남긴 것이 가훈이 된 경우이다.

 잡저(저술)로 편찬된 것으로는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경우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역시 가장 일반적이다. 현재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가훈은 70여 종이 넘지만, 이 중 필사본은 10여 종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저자의 문집이나 족보 등에 수록된 것들이다. 이와 달리 별도의 저술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된 '분봉가훈(盆峯訓)'(연안이씨, 1706), '수졸재가훈(守拙齋訓)'(진주강씨, 1789), '우곡선생훈자격언(愚谷先生子格訓)'(진주강씨, 1724), '풍천노씨가학십도(豊川盧氏 學十圖)'(1847) 등도 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훈자첩(訓子帖), 제영( 題 詠), 도상(圖像) 등으로 남겨진 경우도 있다.

 이런 가훈의 내용은 개인적 덕목인 수신에서부터 가정생활인 제가, 그리고 사회생활인 처세, 거향, 관리 생활 전반에 두루 미치고 있다. 조선시대 가훈서의 내용을 보면 5~6개조에서 30여 개 조목에 이르는 다양함을 보여 주는데, 이들 내용을 요소별로 분석한 연구(정무곤, 조선시대 가훈서의 교육학적 해석, 2006)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15개조 내외가 가장 많고, 공통적으로 포함된 조목을 보면 '봉선, 제사, 목친, 독서, 의복, 언행, 우애, 부부, 교자, 어목, 치산, 농상, 거향, 접인, 교우, 거관' 등으로, 크게 보아 몸가짐(修身), 집안일( 齊家), 바깥( 處世)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한다.

 수신의 항목으로는 성의, 정심, 독서, 언행 등의 항목에 집중되어 있으며, 다음 집안일(齊家)에 관련한 조목으로는 부모 섬기기와 조상제사를 비롯하여 효우, 노비 다스리기, 가정경제 운용의 항목이 주류를 이룬다. 다음으로는 사회활동(處世)과 관련한 항목인데, 종족 간의 돈목을 시작으로 거향, 접인, 교유, 거관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출처:전통사회와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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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맹자/네이버]


 맹자의 성선설

 사람은 누구나 남에 대하여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 있다. 옛날 선왕(先王)은 이 불인지심이 있어서 남들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정치가 있게 되었다. 정치인이 불인지심을 가지고 남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면,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이것을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누구나 다 남에 대하여 불인지심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한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별안간 보았을 때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겨 가서 붙든다. 이것은 어린 아이의 부모와 교제를 맺기 위한 것도 아니요, 동네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요, 또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원망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이런 것에 의해서 살펴보면 사람치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서이다. 사람들이 이 사단(四端)을 지니고 있는 것은 마치 몸에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을 지니고 있으면서 내 스스로가 선한 일을 잘 할 수 없다고 하는 이는 그 임금을 해치는 사람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사단을 확충시킬 줄 알면 이것은 마치 불이 타서 번져 나가고 샘물이 솟아서 흘러가는 것과 같다. 정말 이것을 잘 확충시킬 줄 안다면 사해(四海)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이것을 확충시키지 못한다면 부모도 제대로 섬기지 못할 것이다.[맹자,공손추상/동양철학산책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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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함석헌(咸錫憲) 선생(1901.3.13~1989.2.4)/위키백과사전]


함석헌 선생과 노장 사상


독립운동가,종교인,언론인,출판인이자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였던 함석헌 선생은 오늘날의 노장사상의 토대를 만든 분이다. 그 분의 노자, 장자 사상을 대하는 태도를 그 분의 말씀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노자'에는 미명(微明)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보통 밝다면 환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모를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이 천하만물을 살리는 참빛은 빛이 아닌 빛이다. 그러므로 이(夷)요, 희(希)요, 미(微)라고 한다. 숨은 빛, 가려진 빛이다. 예수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왜 숨겨져 있고 가려져 있나? 물건이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이나 일은 힘의 표현이다. 힘은 강하지만 강하기 때문에 약하다. (중략) 모든 있음은 있음이 아닌 데서 나온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모세가 당신이 누구십니까? 했을 때 온 대답이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했다. 천지 만물은 자기 주장을 아니 하는 이, 자기를 무한히 내 주는 이, 스스로 희생하는 이가 있어야만 있을 수 있다. (중략) 세상에 악이 있고 불의가 있는 것처럼, 그 악과 불의가 있으면서도 세계가 서 가는 것은 진리가 있고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일은 없다.  노자는 이래서 도를 유(柔)한 것 약한 것으로 체험했다."


 "물질주의, 지식주의, 권력주의, 적극주의의 서구문명이 차차 사양길에 접어 들었고, 사람들은 그 산업 방법, 그 학문, 그 종교를 근본에서 고채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때를 당했다."라는 현실 인식에서 노자의 세 가지 보배, 즉 사랑(慈), 수수함(儉), 감히 천하에 앞장 못 섬(不敢爲天下先)의 카다란 가치를 이야기 하며, "하늘이 건져 주려 할 때는 사랑으로 둘러 준다(天將救之, 以慈衛之)."


 "사실 이날까지의 옛 글에 대한 모든 해석은 권위주의, 절대주의, 귀족주의, 고정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중략) 마지막으로 옛글을 고쳐 씹는 데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지금 있는 종교로부터 올 반대이다. (중략) 그럴 때 제일 문제되는 것은 권위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서는 석가나 예수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코 형식에 거리끼지 않았다. 또 저쪽을 승인시키자는 것이 목적 아니었다. 그들에게 권위는 영(靈)에 있었지 글이나 제도에 있지 않았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새 해석을 하고 깨쳤다. 그러고는 옛날의 전통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하지 않노라고 했다.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었다."


 "나는 노자, 장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숲 속에 깃들인 뱁새' 같이 '시냇가에서 물 마시는 두더지' 같이 날마다 그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살아 가는 사람이다. (중략) 나는 일제 시대에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레미야'를 많이 읽었다. 그 압박 밑에서 낙심이 나려 하다가도 그들의 굳센 믿음과 위대한 사상에 접하면 모든 시름을 다 잊고 다시 하늘을 향해 일어설 수가 있었다. (중략) 마찬가지로 이 몇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 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산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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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1.본성이 이치인가 마음이 이치인가

 주자학의 기본명제는 "본성이 곧 이치이다."라는 의미의 '성즉리(性卽理)'이고, 양명학의 기본명제는 "마음이 곧 이치이다."라는 의미의 '심즉리(心卽理)'이다. 주자학에서는 모든 사물이 각각의 이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치가 있고, 개에게는 개의 이치가 있으며, 꽃에는 꽃의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치는 하늘이 정한 것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각각의 사물에 하늘이 정한 이치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모든 이치가 각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가 "만물이 내게 갖추어져 있다."라고 한 말의 연장인 셈이다.

 

[사진 왕수인(왕양명)/네이버 지식백과]

 

 한번은 왕수인이 친구와 함께 유람할 때 한 친구가 절벽에 피어 있는 꽃나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세상에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는데 꽃나무는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 제 스스로 피고 지는 것이니 과연 내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자 왕수인은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는 이 꽃과 그대 마음이 모두 고요할 뿐이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꽃빛깔이 일시에 또렷해졌으니, 곧 이 꽃이 그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였다.

이런 왕수인과 친구가 절벽에 핀 꽃을 보면서 나눈 대화가 양명학의 '심즉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사진 주희/네이버 지식백과]

 

 이런 점에서 본다면 주자학과 양명학 모두 이(理)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유체계는 똑같이 관념론에 속한다. 다만 양자를 구분한다면 주자학은 내 밖의 사물이 객관적으로 있다고 보는 입장이므로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리고, 양명학은 객관적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린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모두 유학이며 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인본주의이다.

인본주의란 세계 만물의 기준을 사람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물에 대한 감각과 인식이 인간 개개인의 판단에 달여 있기 때문에 그 개별 인간 하나하나가 만물을 재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얼핏 보면 유가의 인간중심주의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유학의 또다른 특징은 도덕중심주의이다. '성즉리'와 '심즉리'의 이가 자연법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덕법칙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성즉리'의 성은 도덕성이고, '심즉리'의 심은 도덕심이다.

 주희는 '성즉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보았다. 하지만 예전부터 전해 오는 '대학'에서는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고 보고 정이천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새로 134자를 만들어 넣었다.

 '격물치지'는 '사물에 나아가(格物)' '앎을 완성한다.(致知)'는 뜻이다. 이 말만 보면 앎의 대상이 사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궁극적인 탐구대상은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 속에 들어 있는 이(理)이다. 그렇기 때문에 '격물궁리(格物窮理)'라고도 한다. 주희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만물은 모두 각각의 이를 지니고 있고 사람에게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신령한 앎의 능력이 마음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바탕으로 매일매일 탐구해 가다 보면 마침내 하루아침에 모든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물의 겉과 속, 정교하고 미세한 사물과 거친 사물 할 것 없이 사물의 이치가 다 깨달아질 것이며 내 마음의 온전한 본 모습과 그 마음의 활용이 밝아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주희의 말처럼 온 세상 만물을 다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주희는 독서를 통해 깨닫는 것과 함께 유추법을 제시하였다. 유추법이란 10개 가운데 7~8개를 깨달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얼핏 보면 천하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쉽게 이해 되지 않는다. 이 점은 이렇게 생각해 보자. 개와 고양이와 나무와 돌의 이치는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모습과 역할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개의 이치는 어떤 것일까? 본래 성리학에서는 이치는 변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선(善)이라고 본다. 따라서 개의 이치를 따지는 일은 어떤 개가 가장 좋은(착한) 개인지를 찾는 일과 같다. 가장 좋은 개는 주인 잘 따르고 집 잘 지키는 개일 것이고 주인을 물거나 도둑을 보고 겁을 내는 개는 나쁜 개가 된다. 그리고 이런 평가 원칙은 지금 우리집에서 기르는 개만이 아니라 옆집 개와 뒷집 개,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다른 나라 개들까지도 모두 해당되며, 이미 죽은 개나 앞으로 태어날 개에게도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에서는 이치가 사물 존재보다 앞선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착한) 고양이는 어떤 고양이일까? 쥐 잘 잡고 주인 잘 따르는 고양이가 착한 고양이일 것이며 이 원칙도 이미 죽은 고양이나 앞으로 태어날 고양이에게까지 해당된다.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목재로 쓰기도 좋으면서 예쁜 꽃과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착한) 나무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개와 고양이와 나무의 이치는 다르지만 좋은 나무, 좋은 고양이 좋은 개로 생각을 넓히면 그 이치는 모두 같아진다. 따라서 모든 만물의 이치는 결국 선의 이치라는 점에서 같다는 결론이 나오며 이러한 이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사실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물의 이치를 따지는 것은 사람 중심의 논리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인 유학의 입장에서는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깨달은 궁극의 진리는 그 이치가 내 속에 들어 있는 사람다움의 이치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희는 만물의 이치를 다 합친 것이 태극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격물치지를 통해 궁극에는 태극을 깨닫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젊어서 주자학을 공부했던 왕수인은 주희의 격물치지 이론을 직접 실험해 보았다. 1주일 동안 대나무 앞에 앚아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대나무만 바라보며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대나무대로 나는 나대로 있음을 경험하였다. 왕수인이 깨달은 것은 내 마음이 대나무에게 갈 때 대나무가 비로소 존재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는 타고난 양지를 잘 기르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왕수인의 생각은 생 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여우는 하던 이야기로 되돌아 갔다. "내 생활은 단조로워. 나는 닭을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닭들은 서로 비슷하고, 사람들도 모두 비슷해. 그래서 난 좀 권태로워. 그러나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햇빛을 받은 것처럼 밝아질 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와는 다르게 들릴 너의 발자국 소리를 나는 알게 될 거야. 만일 다른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땅속으로 숨을 거야.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길 봐! 밀밭이 보이니?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나한테 쓸모가 없어. 밀밭을 보아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그래서 슬퍼! 그러나 네 머리카락은 금빛이야. 그래서 네가 날 길들인다면 정말 신날 거야! 밀밭도 금빛이기 때문에 밀은 너를 기억하게 해줄 거야. 그래서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 사랑하게 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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