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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질 인(仁)이란 한자어를 풀어보면 사람人 + 두二가 결합된 형태의 뜻글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二는 둘이 아닌, 사람사이의 거리, 이른바 '호저의 거리'와 상통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느데, 결국 인(仁)이란 글자의 뜻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사람은 그 특성상 혼자 있고 싶은 마음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느정도의 거리, 바로 '호저의 거리'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이 '호저의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관계의 경우는 서로에게 크든 작든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다치게 한다.

 공자의 인(仁)이란 이렇듯 사람사이의  '호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우리는 쉽게 느낄 수 있는데, 아픈 사람을 보면 내 마음도 최소한 즐겁지는 않다. 또, 즐거운 사람을 보면 내 마음도 최소한 슬프지는 않다. 이것이 바로 인(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질다는 것은 바로 '얼마나 더 깊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느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仁)은 인(仁),의(儀),예(禮),지(智),신(信) 중 가장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이다.


☞'호저의 거리'란? 열대 지방에 사는 동물인 호저는 온몸이 가시로 덮여있는 동물인데, 밤이되어 추워지면 서로 가까이 붙어 체온을 유지하는데, 문제는 너무 가까우면 서로의 가시가 상대를 찔러 상처를 내고, 너무 멀면 체온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호저들은 서로 간격을 좁혔다가 가시에 찔리면 다시 조금 간격을 넓히고 하는식으로 해서 결국은 가시에 찔리지도 않고, 추위도 이겨낼 수 있는 서로간의 거리를 찾아내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는 '호저의 딜레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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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의 역사





조선시대 향시(鄕市)는 15세기 말부터 삼남지방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 기록상으로는 성종 1년(1470년)의 흉년으로 전라도의 농민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듬해부터 서로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들고 나와 장을 열었는데, 이것을 장문(場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까지도 지방은 성읍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하여 살던 때여서 성 외곽에 정기적인 장이 설 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 같다. 또 장이 있었다고 해도 5일 간격으로 1일 행정(行程), 즉 하루 왕복거리인 30~40리마다 교통요충지에 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의 현상이다. 즉 임진왜란 전후인 선조 때에 이르러 미약하나마 5일 간격으로 각 지역이 연결되는 시장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장시의 개설은 더욱 진전되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게 되면 국토 전역으로 확대된다. 이것은 그동안의 주거기 확산과 수공업의 활성화, 대동법 시행, 그리고 이에 따른 상품화페경제의 발달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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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통 시장의 분류(종류)와 의미






[김홍도 <장터길> 보물 527호]


 조선시대에는 시장보다는 장시(場市) 또는 장(場)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장시에는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붙는 수식어가 다르다. 우선 장이 언제 열리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 매일 열리는 상설시장을 시(市)라고 하고, 점포를 시전(市廛)이라고 하였다. 시민(市民)은 시전을 운영하는 상인을 말한다. 매일 열리지 않고 주기를 정해 열리는 정기시장은 장(場)이라고 하여 그 주기에 따라 오일장, 10일장 등으로 불렀다. 일정한 주기가 없이 배가 도착할 때라든지 별신제가 열릴 때, 또는 허가된 장소가 아니거나 장을 처음 개설할 때 벌이는 장은 난장(亂場)이라고 하였다.


 장이 서는 위치를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중앙시장과 지역시장이 있고, 경시(京市), 향시(鄕市), 성읍시(城邑市), 가로시(街路市) 등이 있었다. 경시에는 정부로 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시전과 그렇지 않은 난전(亂廛),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잠시 열리는 조석시(朝夕市)가 있었다. 조석시에서는 도시나 성읍의 주민들이 필요한 신선한 생선이나 채소 또는 땔감 등을 거래하였다. 무역이 이루어지는 지역에는 개시(開市) 또는 후시(後市) 등이 있었다.


 거래물종에 따라 시장을 분류하면 일반시장과 특수시장, 농산물시장과 수산물시장으로 구분되고, 거래단계별로 보면 산지시장, 중앙도매시장, 도매시장, 소매시장 등으로, 제조과정을 기준으로 보면 원료시장과 제품시장으로 나뉘는데, 이는 대개가 산업화 이후에 진행된 현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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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의 발생과 명칭

두레는 농사일이나 마을 일 등을 협업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공동노동조직의 대표명칭으로 지역마다 명칭이 다양하다.


[사진 모내기 두레/한국학중앙연구원]


 두레는 상부상조와 공동노동조직으로 촌락조직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레는 조선 후기의 농업 생산과 관련된 공동노동조직으로, 이앙법의 확산에 따른 노동집약 형태의 농법을 반영한 마을단위의 공동노동조직이었다. 조선 후기에 두레 조직이 일반화하는 것은 17세기 이래 노동력의 집중도를 증가시킨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라고 하는 답작농업의 기술과 형태 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집약적 농업 생산방식, 공동노동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레는 밭농사 지역보다는 논농사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두레'라는 명칭은 대표명칭일 뿐 실제 생산형태와 지역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문헌기록에는 두레가 농사(農社), 농계(農契), 농청(農廳)으로 표현된다. 또 두레는 동두레, 대두레, 농사두레, 길쌈두레 등으로 서로 다르게 불리며, 지역에 따라서 영남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풋굿이 두레와 같은 조직이다. 협동작업을 하기 위해 두레를 조직하는 것을 '두레 짠다'고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두레를 낸다', '두레농사'라고도 한다. 그리고 일하는 도중에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두레 먹는다'고도 한다. 또 두레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농악을 들 수 있다. 두레작업을 나갈 때에는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친다. 농악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없애고, 흥을 돋우며, 협동심을 복돋우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를 '두레 논다'고 하고 '두레풍장'이라고도 한다.

 두레와 유사한 조직으로 평안도 일대의 건답(乾沓)지역에는 황두라 불리는 노동조직이 있었다. 황두는 20~30명의 농민이 한 작업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만을 수행한 공동노동조직이었다. 황두의 어원은 향도에서 변이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두레와 거의 유사한 형식이지만 건답지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각 집에서는 반드시 1호당 1명씩 장정을 내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조직상의 강제성도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행동이 빠른 사람을 '황두꾼 같다'고 하였다.

 제주도의 특수한 노동조직인 수놀음도 두레와 유사한 조직형태이다. 농번기에 김을 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집을 지을 때, 지붕을 이을 때, 산에서 큰 나무를 끌어내릴 때, 방앗돌을 굴릴 때, 발을 밟아 줄 때, 마을 길을 닦을 때와 같이 마을의 공동노역에 힘을 합하는 관행이다. 제주도에는 소를 키우는 수눌음인 '번쇠'가 있어 이웃끼리 소를 한데 모아 목야에 방목하고, 그 임자들이 순번제로 감시하며 키운다. 그런가 하면 해녀들의 그물접도 수눌음의 일종으로, 해녀계원들은 몇 개의 접으로 나누어 공동으로 노동, 분배하였다. 이러한 노동 교환은 서로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유대감을 강화시켜 주며, 능률과 일의 신명을 부추기는 노래도 생겨났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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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과 장터 문화



 시장은 시간과 공간의 일치를 통해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물자가 만나는 곳이다. 시장은 물자가 유통되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일대의 지역은 서로 간에 거미줄과 같은 연결망을 이루게 된다. 일단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간에 정보가 오고 가는데, 이것도 역시 지역과 지역을 엮는 끈으로 작용한다.

 농민들이 꼭 사거나 팔 물건이 없더라도 구경 삼아 나와 보는 것이 농촌의 시장이다. 장에 나가면 견문을 넓히고, 친지나 친척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시장에서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 중의 하나가 혼담(婚談)이다. 혼인을 통해 농민들은 사돈을 맺게 되고, 그 유대의 끈이 된 시장은 이들이 가지는 또다른 공동체적 연망(聯網). 시장은 이처럼 조직이 없는 민중에게는 자연스러운 집회장소를 제공한다. 민란의 시작도, 일제 때의 만세운동도 그 배경이 시장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은 경제적 행위를 하는 공간이지만 농민들에게는 동시에 일상의 활동에서 잠시 해방되는 날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히 시장에서 행해지는 각종 민속놀이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선 후기에 탈춤의 연희장소로 알려진 곳은 주로 시장터이다. 야유(野游), 오광대(五廣大) 가면극 등이 행해진 경상도 동래(東萊) 중앙통의 시장 터, 수영(水營)의 시장 터, 그리고 고성(固城) 지역 등이 이러한 예이다.


[가락오광대 중 할미,영감 과장의 한 장면/부산일보DB]


 남한강 주변에는 산신과 용신에 대한 별신제가 행해졌다. 육로가 발달하기 전에는 수로가 운송로로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강변에 시장이 형성된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개펄장터에서 이러한 별신제가 열렸다. 남한강이 중원벌을 가로질러 올라가면 충주 목계장에 이르는데, 이곳의 별신제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목계장은 소금배가 닿을 때마다 임시로 서는 장이다. 소금배는 대개 한 달에 세 번 닿았으며, 한번 장이 서면 여러 날 지속되었다. 이때마다 음성, 괴산, 청안, 영풍, 제천, 단양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도 북구 및 강원도 남부의 여러 읍에서 장꾼들이 몰려왔다. 뱃길이 무사하고 장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기원을 담은 목계별신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행해졌다. 별신제는 부용산신과 남한강 용신을 모셔오는 강신굿으로 시작하여 줄다리기 행사로 이어진다.


[사진 충주 목계나루터 전경-목계교가 놓이기 전 이 곳은 백여척의 상선이 집결한던 곳이다./네이버]


 줄다리기는 강을 경계로 동서 양편으로 나누어 줄을 당긴다. 동편은 수줄이고 서편은 암줄이 된다. 줄꾼이 동쪽으로는 강원도 강릉에서, 서쪽으로는 서울에서 까지 동원되었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송신굿으로 행사를 마무리 한다. 이긴 편은 그해 운수가 좋다고 하여 잔치를 벌였다. 줄다리기에 사용된 줄은 남한강 양편에 걸어 놓아 여름장마의 액막이로 떠내려가게 둔다. 이 행사는 1967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7월 백중이 되면 시골 오일장에서는 농사꾼들을 위해 백중장을 열었다. 이때가 되면 시장권 내에 있는 농사꾼들이 씨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장으로 모였다. 이 대회는 장의 번영을 목적으로 시장상인들이 추렴을 하여 마련한 각종 행사 중의 하나이다. 이날은 낮부터 밤는게까지 행사가 이어진다. 4월 초파일에는 불놀이를 했으며, 사당패를 불러 풍물, 무등, 줄타기 등을 하였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사시(徙市), 즉 시장 터를 옮기는 관행이 있었다. 가뭄을 해결하는 것과 시장을 옮기는 것 간에 어떤한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시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므로 장터의 이전은 가뭄의 심각성을 알리는 극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을 든다. 또 하나는 대체로 이동장소가 강가, 또는 평소에는 물에 잠겨 있던 곳이라는 점인데, 이것 역시 가뭄을 과장하는 방법이 된다. 시장의 특징인 소란함도 이러한 해석 중에 들어 있는데, 시장에서 들리는 소음이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을 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해석이든 시장을 이동한다는 그 자체가 가지는 상징적 효과가 이러한 관행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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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시계가 없던 옛날, 일반 민가에서의 시간 측정 방법


[사진 고려시대 해시계/네이버지식백과]


 서울이나 몇몇 중요한 도시에서는 새벽이나 저녁에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그렇지만 일반고을에는 시계가 없었고 시간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스스로 시간을 알아 내야 했다. 시간을 알아 내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시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민간에서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해시계(sundial)였다. 해시계는 가장 만들기 쉬운 시계였으므로 지금도 꽤 많이 남아 있다.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김정희의 옛집에도 해시계 받침 기둥돌이 남아 있듯이, 양반집에서는 종종 해시계를 놓아 시간을 쟀다. 또, 성냥갑처럼 작은 휴대용 해시계도 많았고, 때로는 작은 해시계를 부채자루에 매달아 선추(扇錘)로 쓰기도 하였다. 이런 휴대용 해시계는 어디서나 방향을 알아낼 수 있도록 대개 나침반이 함께 붙어 있었다.


[사진 고려시대 일영의(해시계)/높이9.5cm/합천 해인사 소장/한국한중앙연구원]


 그렇지만 해시계는 밤이나 궂은 날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향시계(香時計)였다. 향시계는 주로 절에서 많이 썼는데, 참나무에서 나는 버섯을 잿물에 삶은 뒤 가루를 내어 돌 따위에 글자 모양으로 파놓은 홈에 채워 놓은 것인데, 여기에 불을 붙여 그 타들어가는 정도에 따라 시각을 판별하는 것이다. 비슷한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는 서양에 초시계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과거시험 가운데 초가 다 탈 때까지 시권(試券:답안지)을 내게 하는 각촉시(刻燭試)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궂은 날 향시계도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 하고 궁금하겠지만 이때는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판별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대개는 시간을 몰라도 그만이었다.

 그러면 시계가 없을 때에는 어떻게 시간을 쟀을까? 우선 낮시간을 아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해가 어느 곳에 떠 있는가를 보고 알아내는 방법이다. 해의 높이가 아니라 해가 정남쪽에 떠 있는 시각을 오정으로 하여 해가 얼마나 남쪽에 가까이 있는가를 판별해서 시간을 알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어느 정도 인지능력이 생겨나면 곧바로 동서남북을 가르쳤다고 한다. 소혜왕후 한씨의 '내훈(內訓)'에서도 '예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여섯 살이 되면 셈과 방위이름을 가르칠지니'라고 하였다. 방위를 아는 것은 아이들에게 공간감각과 함께 시간감각을 익히는 가장 기초적인 방편이었다.

 방위를 알아 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물론 나침반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풍수지리가 유행하여, 지관들이 항상 패철(佩鐵) 또는 나경(羅經)이라 부르는 나침반을 가지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사실 지관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나침반은 마음만 먹으면 구하기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또, 굳이 나침반을 이용하지 않아도 대강의 방위는 알아낼 수 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북극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공해가 거의 없고 밤이 칠흑같이 어두웠던 예전에는 날만 맑으면 어디서나 별이 또렷하게 보였으므로 북극성을 바라보고 서서 팔을 벌리면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이 된다. 이 방법이 미덥지 않으면 마당에 기다란 막대기를 세워 놓고 낮에 그림자를 관찰하여 그림자가 가장 짧아졌을 때의 그림자 방향을 남북으로 정하면 된다.


[사진 북두칠성/위키백과]


 남북이 정해지면 해시계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반 모양의 돌에 방사선 모양으로 시간을 그리되, 남북방향에 자시와 오시를, 동서방향에 묘시와 유시를 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해가 사라진 밤에는 별이 교대했다. 하늘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 시간을 판별했던 것이다. 북극성은 찾기 어렵지 않았다.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 끝자리의 별 메라크(Merak)와 두베(Dubhe) 두 개를 직선으로 이어서 두 별의 거리 다섯 배를 한 연장선상에 북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동서양이 똑같이 사용했다.


[사진 북극성 찾는방법/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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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 나오는 '태평'의 세계에 관한 설명
[관련글 읽기: 장자에 나오는 '덕이 가득한 나라'에 관한 이야기]




대저 제왕의 덕은 하늘과 땅을 최고의 조상으로 삼고, 도덕을 주인으로 삼으며, 무위를 늘 그러함으로 삼는다. 무위는 곧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써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유위는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쓰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것은 저 무위인 것이다.
윗사람이 무위하고 아랫사람 또한 무위한다면 이것은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덕을 함께하는 것이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덕을 함께하면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게 된다. 아래사람이 유위하고 윗사람 또한 유위한다면 이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도를 함께하는 것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도를 함께하면 군주답지 못하게 된다. 윗사람은 반드시 무위하여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을 써야 하고, 아랫사람은 반드시 유위하여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뀌지 않는 불변의 원칙이다.
그러므로 옛날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게 왕 노릇 하던 사람은 지혜가 비록 온 우주의 원리를 헤아릴 만해도 스스로 계획을 세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록 변별력이 온갖 사물의 차이를 세세하게 드러낼 수 있다 해도 스스로 이론을 세워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지닌 능력이 인간 세계 전체를 포용할 수 있어도 스스로 이를 실천에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하늘이 낳아 주지 아니하여도 온갖 것들은 변화한다. 땅이 길러 주지 아니하여도 온갖 것들은 자라난다. 제왕이 함이 없어도[무위]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공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보다 신비스러운 것은 없고 땅보다 부유한 것은 없으며 제왕보다 위대한 것은 없도다."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제왕의 덕은 하늘과 땅에 짝하니 이것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타고 온갖 것들을 몰며 인간의 무리를 부리는 길이로다."라고 한 것이다.




근본은 윗사람에게 달려 있고 말단은 아랫사람에게 달려 있다.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군주에게 달려 있고 실무적으로 세밀하게 시행하는 것은 신하에게 달려 있다.
삼군의 대군과 다섯 가지 무기로 무장한 특수부대를 운용하는 것은 덕의 말단이다. 상벌을 내리고 이해관계로 거래하고 성문화된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교화의 말단이다. 의례의 절차와 법률의 규정을 상세히 규정하고 신하들의 직책과 실제의 수행을 상세히 비교, 감시하는 것은 행정수단의 말단이다.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소리에 맞추어 무장이 깃털을 들고서 춤을 추는 모양을 갖추는 것은 음악의 말단이다. 큰 소리를 내어 울고 읍을 하고 허술하게 상의를 입고 허리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성대하고 오랜 기간 상례를 치르는 것이나, 짧은 기간 간단하게 상례를 치르는 등의 세부 사항은 애도를 표현하는 말단이다.
이 다섯 가지 말단은 모름지기 정신이 움직이고 심술이 작동한 뒤에야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다섯 가지 말단적 학문은 옛사람들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나 이것을 앞세우지는 아니하였던 것이다.
군주가 앞서고 신하가 따른다. 아버지가 앞서고 자식이 따른다. 형이 앞서고 아우가 따른다. 어른이 앞서고 어린 사람이 따른다.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따른다. 남편이 앞서고 부인이 따른다. 대저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과 앞서고 뒷따름은 하늘과 땅이 가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이 모델로 취한 것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신이 밝혀지는 자리이다. 봄과 여름이 앞서고 가을과 겨울이 뒤따르는 것은 사계절의 순서이다. 온갖 것들이 변화하고 자라날 때 갓 나와 꼬부라진 새싹은 모양이 가지각색이지만 번성하고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은 자연 세계의 변화의 추이이다.
대저 하늘과 땅이 지극히 신비스러우나 높고 낮음, 앞서고 뒷따름의 순서가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도에서랴!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직계를 높이고, 조정에서 일을 논할 때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을 높이고, 마을에서 일을 논할 때에는 연장자를 높이고, 커다란 행사를 벌일 때에는 지혜로운 사람을 높이는 것이 큰 도의 순서이다.
도를 말하면서 그 순서를 말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도를 말하면서 도를 부정하는 자가 어찌 도를 취하겠는가!


[사진 장자/네이버 지식백과]



이런 까닭에 옛날 대도를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하늘을 밝히고 도덕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도덕이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인의를 그 다음으로 하였다. 인의가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분수를 그 다음으로 하였다. 분수가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형명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형명이 밝혀지고 나서야 인임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인임이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원성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원성이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시비를 그 다음으로 하였다. 시비가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상벌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상벌이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저마다 마땅한 자리에 처하게 되고, 귀한 사람과 높은 사람이 저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리에 서게 된다. 어질고 밝은 사람과 못난 사람이 저마다 실정에 맞추어지게 되면 반드시 저마다의 사회적 역할이 그 능력에 다라 나뉘게 되고, 그 사회적 신분이나 직책에 따라 처신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윗사람을 섬기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랫사람을 길러 주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다스리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몸을 닦되 지모가 쓰이지 않게 하여 반드시 그 하늘로 돌아가게 한다. 이것을 일컬어 '태평'이라고 하는데, 곧 통치의 이상이다.
그래서 옛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형[形]이 있으면 이름[名]이 있다.


형명이란 것은 옛사람들도 가지고 있었으나 내세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옛날 큰 길을 말하는 살마은 다섯 번째가 되어서야 형명을 언급하였고, 아홉 번째가 되어서야 상벌에 대해 말하였다. 갑작스럽게 형명을 말하는 것은 그것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상벌을 말하는 것ㅇ은 그 처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길을 전도하여 말하고 길을 순서를 바꿔서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어찌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갑작스럽게 형명, 상벌을 말한다면 이것은 통치의 도구만 아는 것이지 통치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쓰일 만은 하겠으나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부리기에는 부족하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변사라고 하는데 곧 한 가지 재주만 갖춘 사람이다. 예법 도수, 형명 비상은 옛사람들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섬기는 방법이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기르는 방법은 아니다.
[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문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장자,'천도']


[관련글 읽기:장자에 나오는 '덕이 가득한 나라'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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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먹는 일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먹을 것을 유달리 중시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뿐 아니라 대표적인 예로 진달래꽃을 참꽃, 철쭉꽃을 개꽃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철쭉꽃이 진달래꽃보다 아름다워도 먹지 못하는 철쭉꽃은 '개꽃',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은 '참꽃'이라고 불렀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가와 없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루의 시각을 밥 먹을 때로 구분했는데, 그래서 저녁밥을 먹는다고 하지 않고 통상 '저녁'을 먹는다고 말한다. 또 인사말로 '밥 먹었느냐'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예전에 너무 가난하고 굶주리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인사말이 생겼다고 오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어에서 '굿 모닝', '굿 이브닝'이라는 말을 우리는 "아침밥 먹었습니까?", "저녁밥 먹었습니까?"로 인사했던 것이다. 시간을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밥 먹는 때로 생각했던 관습이 매우 오래 된 것이라는 것은 '끼'라는 말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끼'와 '때'는 본래 같은 말이었다. 16세기 중종 때 편찬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時'를 'ㅂㅅ기니 시'라 풀이했다. 요즘도 노인들은 '세 끼 밥'이라 하지 않고 '세 때 밥'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원으로 살펴보더라도 '끼'는 '때'와 함께 하나의 낱말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다. 또 우리는 뭐든지 먹는다고 표현했다.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의 말들이 먹는다는 말 한마디로 표현된다. 영어에서는 물이나 술을 마시는 것을 'drink' 담배 피우는 것을 'smoke'로 표현하지만 우리말에서는 모두 먹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마음도 먹고, 욕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귀도 먹고, 겁도 먹고, 잊어먹고, 떼어먹고 등의 표현이 보여 주듯 우리의 오래된 언어생활에도 먹는 것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우리는 예전부터 다른 민족에 비해 많이 먹었다. 성인 남자는 한 끼에 420cc의 곡물을 먹었는데, 이는 지금의 식사량에 비하면 3배에 이르는 것으로,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에 비해서도 꽤 많은 양을 먹었다. 끼니는 예전에는 '조석(朝夕)끼니'라는 말 처럼 한 두 끼를 먹었으며, 해가 긴 여름철이나 힘든 일을 할 때에는 간단한 점심(點心)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기도 했다. 예전에는 어린이도 180cc를 먹어 지금의 어른 보다도 더 많이 먹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먹었을까? 그 원인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난해서 그랬다는 지적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전에 너무나 어렵게 살아서 먹을 것이 생기면 정신없이 허겁지겁 많이 먹는 습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전의 가난이나 기근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이전에는 중국, 일본, 서양 어디나 흉년, 기근이 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심지어는 영아 살해 등의 풍습이 횡행했다. 우리민족이 많이 먹었다는 것은 늘 많이 먹었다는 것이지 어쩌다가 한 번 먹을 것이 생겼을 때 닥치는 대로 많이 먹었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하면 늘 많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었다. 조선시대에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출, 공출 등으로 쌀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남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쌀의 완만한 증산, 보리의 급격한 증산이 식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쌀은 칼로리가 높고, 고른 영양소를 갖추고 있는 우수한 식품이다. 또, 벼는 파종량에 비해 수확량이 많고, 벼농사는 토지 이용도가 높아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훌륭한 곡식이었다.

 가장 중요한 부식인 김치는 무, 오이, 가지 등으로 만들었는데, 18세기부터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여 지금처럼 빨간 김치가 생겨났으며, 19세기에는 배추가 주재료로 부상했다.

 식사도구로는 밥상과 수저를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작은 소반을 써서 식사를 했고 성인은 각자 따로 상을 받아 먹었다. 집 구조가 조리를 하는 부엌과 밥을 먹는 방으로 분리되어 있고, 부엌에서 방에 이르는 동선이 복잡하여 소반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중국이나 일본이 13, 14세기부터는 젓가락만으로 밥을 먹었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써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상차림에는 항상 국이 있었는데, 그 국이 건더기가 많고 뜨거웠기 때문에 숟가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생활문화/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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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건국이념인 주자학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주류 학문으로 북송의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 등 다섯 명의 학자를 거쳐 남송의 학자인 주희가 집대성한 학문이며 송학, 정주학, 도학, 성리학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주자학은 이전 시대 한당의 훈고학이 자구 해석에 얽매이거나 경전을 기송하는 데만 주력한 나머지 유학의 장점인 실천적인 측면이나 수양의 문제를 방기함으로써 불교와 도교에 사상적 주도권을 빼앗긴 것을 전면적으로 반성하면서 일어났다.

 주자학은 동시대의 불교와 도교의 이론을 빌려 이전의 유학이 생활 윤리 규범에 머물렀던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축하였는데, 그중에서 우주와 인생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이(理)와 기(氣)이다.

 이기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기가 현상과 신체, 물질, 도구, 수단 등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이(理)는 본체와 정신, 본질, 목적 등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존재론뿐만 아니라 윤리학 또는 인간학, 심성론과 수양론, 학문 방법론에 이르기 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탁월한 설명력을 가지는 범주체계이다.

 기는 일기, 음양, 오행, 만물 등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차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기의 응짖 또는 변형일 뿐이며 만물의 생성 소멸 또한 기의 이합집산으로 설명된다. 곧 기가 모이면 사물이 생성되고 흩어지면 사물이 소멸하는 것이다.

 이(理)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기에 의해 설명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제멋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를 갖추고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다. 이 있어야 할 모습을 갖추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理)이다. 이는 우주와 만물의 근거이며 우주가 우주로 있어야 할 모습을 부여해 주는 원리이자 본질이다. 개별적으로 말하면 이는 개개의 사물이 개개의 사물다운 특징을 갖게 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기론은 각자 뚜렷하게 구별되는 개념이지만 이 둘의 관계는 때로 미묘하고도 복잡한 사색을 필요로 할 만큼 까다로운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둘은 떨어지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는다는 뜻인 불리부잡(不離不雜)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문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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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황의 성학십도/태극도 1568(선조 1)년 12월 왕에게 올린 상소문/출처:네이버/한국한중앙연구원)


 진차(進箚)

 성학(聖學)에는 큰 실마리가 있고 심법(心法)에는 지극한 요령이 있습니다. 이를 드러내어 그림을 만들고 이를 지적하여 해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入道之門)'과 '덕을 싸흔 기초(積德之其)'를 보여 주려 하는데, 이는 제가 부득이하여 만들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임금의 마음은 온갖 정무가 나오고 온갖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많은 욕심이 서로 공격하고 많은 사악함이 번갈아 침범하는 곳입니다.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태만해지고 방종함이 계속된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 같아서 누가 이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 도를 만들고 이 설을 지은 것이 겨우 열 폭의 종이에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를 생각하고 익히는 것이 단지 평소 한가한 틈을 타서 하는 공부에 불과하지만, 도를 깨달아 성인이 되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베푸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학도(大學圖)

 경(敬)이란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며 만사의 근본이다. 그 힘쓰는 방법을 알면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고서야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대학'도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끝을 맺을 수 없게 됨을 일관하여 의심치 않게 된다. 마음을 일단 세운 뒤 이 경에 의해 사물을 밝히고(格物), 앎을 투철히 하여(致知),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리하게 되면 이른바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尊德性而道問學). 이 경으로써 뜻을 성실히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여(正心), 자신의 몸을 수양하면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도 빼앗기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경으로써 집안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스려서 천하에까지 미치면 이른바 "자기 자신을 수양해서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공손한 태도를 독실히 하여 천하가 태평해지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상의 모든 것이 하루라도 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경이라는 한 글자가 성학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요체가 아니겠는가? (이상은 '대학혹문'에 나오는 주자의 말)

 경이라는 것은 위로나 아래로나 모두 통하고 공부를 착수하는 데 있어서나 그 효과를 거두는 데 있어서나 항상 힘써서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의 말이 위와 같았으니, 이제 이 열 개의 그림도 모두 경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요컨데 이(理)와 기(氣)를 겸하고 성(性)과 정(情)을 포함한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성이 발현해서  정이 될 때가 곧 마음의 기미(幾微)인데, 이는 온갖 변화의 중심이며 선악의 분기점이 되는 때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데 전념하여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더욱 이것들을 몸소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잘 보존하는 존양(存養)의 공부를 깊이 하고, 마음이 발동한 뒤에는 잘 살피는 성찰(省察)의 습관이 익숙해져서, 진실됨을 축적하고 오래 힘써서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다면,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으로 중(中)을 포착한다는 성학(精一執中之聖學)과 본체를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모든 일에 올바로 대처한다는 심법(存體應用之心學)이 다른 곳에서 구하기 전에 여기에서 얻어질 것입니다.

[이황 '성학십도'/원본 '퇴계집' 권7/'한국문집총간' 29 (민족문화추진회, 1989)/동서양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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