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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그림감상'은 가로 23.9cm 세로 28.1cm 크기의 작품으로, 유생들이 세로로 길게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잡고 빙 둘러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림을 감상하는 유생들의 표정이 모두 다르게 표현돼 있는데, 등장 인물들의 표정이 각기 매우 진지하다. 특히 한 유생은 그림에 침이라도 튈까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그림을 감상하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다. 작품에서 종이에 그려진 그림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태도와 표정들에서 유생들의 진지함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그림감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그림감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그림감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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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삼형제/ⓒ울산매일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축복할 만한 일이며 온 가족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엄격하기 짝이 없던 유학자들도 아이, 그중에서도 특히 손자가 탄생했을 때에는 체면과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기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96년 3월에 쓴 다음과 같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초사흘에 관가의 하인이 돌아오면서 기쁜 소식을 가져왔더구나.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인간의 즐거운 일이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게다. 육순의 늙은이가 이제부터 엿을 물고 구슬을 희롱할 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느냐?...

오늘이 바로 내 손자의 삼칠일이로구나. 이백여 명의 관속(官屬)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 주더구나. 그제서야 나도 경술년에 순조(純祖) 임금께서 막 태어나셨을 때 산해진미로 기쁨에 넘쳐 즐거워하면서 억조창생을 고무케 하시던 성심(聖心)을 가늠하겠더라. 다 쓰지 못한다.


아이의 탄생을 전하는 편지를 읽고서 박지원이 "응애응애" 하고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편지에 가득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아이의 탄생을 얼마만큼 기다려 왔고, 또 그것을 어느 정도 기뻐하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박지원은 얼마나 기뻤던지, 아이가 태어나 21일째 되던 삼칠일에 200여 명이나 되는 관속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박지원과 같이 아이의 탄생을 크게 축하해야 하는 경사로 여겼기 때문에 갓 태어난 손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재산을 분배하는 일도 허다하였다.


?... 장손에게 명문(明文)을 성급(成給)해 주는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오늘은 네가 태어난 지 7일이 되어 너를 대립(大立)이라 이름 지으니 종사(宗祀)가 이로부터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에 내가 매우 기쁠 뿐만 아니라 이는 가문의 적지 않은 경사이다.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전래된 사내종 권막(權莫)의 다섯째 소생 계집종 끝지와 온계(溫溪) 집 앞 우물가의 밭[井田] 10마지기를 영영 별급(別給)한다. ...


위 문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이 1559년 6월에 그의 맏조카 이완(李完)이 아들을 낳자 7일 만에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해 준 것이다. 이호아은 손자가 태어난 일이 가문의 경사라고 말하면서 손수 이름을 '대립'이라 지어주고, 말 그대로 문전옥답인 집 앞 우물가의 밭과 이를 경작할 수 있는 계집종을 특별히 분배해 주고 있다.

온 가족의 관심은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고 축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지원이 위의 손자를 얻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세로, 경상도 안의현감에 재임 중이었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곧장 서울로 달려가서 손자를 안아 보고 싶었을 것이나 그럴 수가 없었다. 관찰사나 국와의 허락 없이 임지(臨地)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자가 어떻게 생겼을지 더욱 궁금해지고, 또 누구를 닮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집으로부터 아이의 소식이 담긴 편지가 어서 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오는 편지에는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잔뜩 화가 난 박지원은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손자의 용모에 대해 직접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네 첫 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미목(眉目)이 밝고 수려하다 하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점점 충실해져서 그 사람 꼴을 갖춤이 자못 초초(艸艸)하지 않다고 하더니, 종간(宗侃)의 편지에도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더구나. 대저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박지원은 아이를 키우는 데 대해서도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고 지시하였다. 어느 아이든지 조금 자라서 걸어다니게 되면 그때부터 말썽꾸러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비록 어리지만 이때에 기본적인 성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돌보느냐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제사에 날씨가 아직 더워 방구들이 찌는 듯하니, 아이들도 조양(調養)하기가 몹시 어려운데, 하물며 모든 게 입에 들어갈 물건임에야 어떻겠느냐? 반드시 모름지기 경고(京橋)의 어린 계집종을 빌려 정성껏 바깥채에서 돌보게 하고, 안채 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귀봉(貴奉)이의 술주정은 요즘은 심하지 않으냐? 그 사람은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다. 절대로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


날씨가 더운데다가 제사를 지내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 안이 찌는 듯할 것이니 아이를 기르는데 유의해야 하며, 또 모든 물건을 입에 넣을 나이이므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를 당부하고 있다. 또 계집종을 빌려 바깥채에서 아이를 돌보게 하고 안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술주정이 심한 귀봉이에게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박지원의 모습을 통하여 조선시대 양반들이 후손의 성장과 교육에 얼마나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생후 1년을 무사히 넘기면 돌잔치를 크게 열었다. 이때 온 가족이 모여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돌이 된 것을 축하하고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를 점치기도 하였다. '돌잡이'가 그것인데, 돌상 앞에 필묵, 옥환(玉環), 인장 등을 늘어놓고 아이가 무엇을 잡는지를 보아 장래 어떠한 인물이 될 것인가를 판단하였다. 아이가 필묵을 잡으면 문인이 되어 문명을 널리 떨칠 것이고, 옥환을 집으면 덕성을 갖춘 인물로 성장할 것이며, 인장을 만지면 관리가 되어 이름을 날릴 것이라 전망하였다. 아이가 무엇을 잡든지 아이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가 반영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김홍도, 초도호연(初度弧宴)/ⓒ국립중앙박물관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돌잡이를 하는 모습 


조선시대에는 돌잔치에서 책을 써 주는 풍속이 있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아이가 덕성을 갖춘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정성을 담아 아들이나 손자에게 손수 책을 필사해 주었다. 또 돌잔치에 초대된 유명한 하객에게 한두 글자씩을 써 달라고 부탁해서 '천자문'을 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돌잔치는 한 아이가 태어나서 무사히 한 해를 넘긴 것을 축하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이 아이와 유명한 하객이 일종의 연망(聯網)을 맺는 자리였는데, 이때 하객들이 한 글자씩 써서 만들어 준 '천자문'이 바로 그 증표였던 것이다.

실제로 아이에게 '효경(孝經)'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같은 책을 제작해 주는 사례를 충청도 서산에 세거했던 경주김씨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노응(金魯應), 1757~1824)은 아들 김도희(金道喜)가 1784년에 돌을 맞이하자 인륜에 밝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직접 

'효경'을 써 주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아들 김도희가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서 자신의 아들 김상준(金商濬)이 돌을 맞이하자 어린 나이부터 오륜을 엄중히 체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몽선습'을 써 주었다. 이는 그가 이 책의 끝에 쓴 다음과 같은 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내아이가 태어난 날에 책을 써서 내려 주는 것은 동방의 풍속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제 삼복더위를 당하여 '동몽선습' 한 책을 땀 흘려 가며 쓰노니, 네 아버지의 애태우는 마음을 생각하고 오륜(五倫)이 가장 엄중함을 체득하고 끊임없이 전진하여 그치지 말며 쉼 없이 부지런하여 더함이 있도록 하라.


돌에 별급문서를 작성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던 부안김씨 김명열(金命說, 1613~?)은 60세가 다 되도록 친손자를 얻지 못하자 자손이 끊어질까 근심하였다. 그러던 중 둘째 아들 김문(金璊)이 마침 사내아이를 낳으니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어느덧 한 해를 무사히 넘겨 돌을 맞이하자 기뻐서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돌을 맞은 손자에게 써 준 아래의 별급문서에 자세히 쓰여 있다.


나이가 육십이 되었는데도 친손자를 얻지 못하여 슬하가 무료할 뿐만 아니라 후사가 끊어지지 않을까 항상 크게 근심하여 왔다. 막내아들 문(璊)이 비로소 아들을 낳아 이름을 수종(壽宗)이라 하였다. 태어난지 겨우 한 돌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눈썹이 뚜렷한데다 살결이 백옥(白玉)과 눈처럼 뽀얘서 사랑스러우며 용모가 준수하여 장차 크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만일 맏아들 번(璠)이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당연히 봉사손(奉祀孫)이 될 것이니 그 경사스럽고 다행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경사나 즐거움이 있을 때 특별히 재산을 분배하는 것은 관례이다. 다행히 이와 같이 손자를 얻었으니 어찌 별급이 없을 수 있겠는가.


'김수종 별급문기'

전라도 부안에 살던 김명열이 1672년에 손자 김수종의 돌을 맞이하여 약간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서 작성한 문서이다. 손자를 얻은 기쁨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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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기구로는 수레와 가마가 있었다. 수레와 가마를 구분하는 기준은 바퀴의 유무이다. 바퀴가 있는 것은 수레라 하고 바퀴가 없는 것은 가마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수레는 널리 쓰이지 못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소가 끄는 수레가 보이기는 하지만 그 후로는 수레가 널리 사용되었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8세기에 박제가(朴齊家)가 '북학의(北學議)'에서 수레의 좋은 점을 열거하며 수레를 사용하자고 열렬히 주장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레의 사용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무용총 우거도-중국 길림성 집안현 소재 고구려 무용총 벽화 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렇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운송수단이 발달하려면 그에 맞추어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19세기 초 영국에서 돌을 잘게 부수어 도로를 포장하는 매커덤공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도로의 포장에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유럽에서도 16세기 후반에 초보적인 형태의 사륜마차가 나타났고, 여럿이 함께 타는 합승마차는 17세기에 가서야 등장했던 것도 도로 포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도로사정은 땅의 자연적인 상태가 도로에 적합한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평탄한 땅이 넓게 펼쳐져 있으면 수레가 통행하기 쉬웠다. 하지만 한반도 지형은 산이 많고 그에 다라 골짜기도 많아서 바퀴 달린 수레가 통행하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고대 전투에서 전차(戰車; Chariot)전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마전투가 발달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개개인이 들고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상품을 파는 보부상(褓負商)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도 수레의 사용이 어려워 물자 운송이 대량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만으로 물건을 운반할 수 없을 때에는 소나 말의 등에 물건을 실어 운반할 수는 있으나, 바퀴 달린 수레에 소나 말을 매어 운반하는 방법은 일반화되기 어려웠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수레가 쓰이기는 했지만 사람이 타는 승용보다는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운송용으로 쓰였다.


그러나 적지만 승용수레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승용수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초헌(軺軒)이다. 초헌은 초거(軺車)라고도 하는데, 바퀴 하나가 달린 높다란 수레를 말한다. 즉 의자에 기다란 끌채가 좌우로 붙고, 의자 아래에는 기둥이 있고, 그 밑에 커다란 바퀴 하나가 달려 있다. 옛날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수레라 하면 말 네 마리가 끌었는데, 초(軺)는 한두 마리 말이 끄는 가볍고 작은 수레를 말했다. 그리고 헌(軒)은 높다란 집을 뜻했다. 따라서 초헌은 사람이 올라타는 부분이 높이 있는 간단한 외바퀴 수레를 말한다.


초헌/ⓒ네이버지식백과



초헌은 1440년(세종 22)에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수레이다. 그래서 중국 사신이 초헌을 보고는 신기해하여 잠시 태워 준 일도 있었다. 이 초헌은 가마와는 뚜렷이 다른 독특한 탈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었다. 중앙의 육조 판서, 참판이나 지방의 도 관찰사급에 해당하는 2품 이상의 관원이 타는 것이었다. 고위관원뿐 아니라 왕자나 왕의 사위인 부마도 타고 다녔다.


초헌, '기산풍속도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헌의 기다란 끌채에는 가로로 길게 멍에목을 끼워 앞뒤로 양쪽에서 초헌을 끌고 가므로 초헌을 움직이려면 서너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격이 높은 수레로 높은 벼슬의 상징과 같은 수레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나 형과 아우가 나란히 초헌을 타고 가는 것을 가문의 영예로 알았다. 그러나 불편한 점도 있었는데, 바퀴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바닥의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서 울퉁불퉁한 길에서는 심하게 덜거덕거렸다.


좌거, 김홍도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국립중앙박물관



초헌 외에 흔히 보기는 어려웠지만 좌거(坐車)라는 수레도 있었다. 좌거는 흔히 중국에서 사용되었지만, 중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에도 있었다. 좌거란 말 그대로 앉아서 타고 가는 수레로, 형태는 가마와 같은데 바퀴가 달려 있고 말이 끄는 것이다. 이는 1786년에 김홍도가 그린 안주목사 부임행렬 그림에 등장한다. 구체적인 모양은 유옥교자(有屋轎子)처럼 지붕과 벽체가 있고, 사면에 휘장이 둘려 있으며, 바퀴가 둘 달려 있다. 가마부분의 옆으로 뻗은 멍에목을 앞뒤로 네 사람이 잡고, 맨 뒤에서 다시 한 사람이 끌채를 잡아 균형을 유지하며 가는 가마형 수레이다. 그러나 이런 수레가 널리 사용되지는 않은 듯하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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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동차와 기차가 잘 포장된 도로와 철길을 달리고,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날아다니니 나라 안은 물론 세계를 돌아다니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예전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발전결과가 18세기에 산업혁명으로 확산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동하는 방법으로는 그저 걷는 것 외에 말, 나귀 등의 동물을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사람이 메거나 들어 움직이는 가마나 바퀴가 붙어 있는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동수단들은 각자 특성에 따라, 경우에 따라 이용되었지만, 신분적 제약을 받기도 했다.

 

말은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용했던 보편적인 승용수단이었다. 말은 도로 사정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고, 기동성이 있어 먼 거리를 빠른 시간에 이동할 수 있으며, 게다가 체구가 커서 그 위에 높이 올라탄 사람은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도 아무나 탈 수 없었다. 지방에서는 특별한 경우 종도 말을 탈 수 있었지만 도성 안에서는 양반신분만이 탈 수 있었다. 만약 노인이나 환자가 아닌데도 일반백성이 소나 말이나 나귀를 타다가 잡히면 탔던 동물을 압수당하고 장(杖) 80대를 맞아야 했다.

 

양반은 먼 거리를 갈 때에는 대개 말을 이용했고, 만약 말이 없으면 세를 내어서라도 말을 타고 다녔다. 양반이 동구(洞口) 밖을 나서면서 말이나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 양반의 체모가 손상되는 것으로 여겼다.

 

훔쳐보기, 김홍도 《행려풍속도병》/ⓒ국립중앙박물관

 

 

 

양반의 나들이에 말과 함께 따르는 것이 종이다. 종은 말구종을 하기도 하고, 먼 거리를 갈 때에는 짐을 지고 따라나섰다. 그래서 양반이 먼 길을 가려면 육족(六足)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의 발 넷과 종의 발 둘을 합하여 이른 말이다. 말과 종은 항상 함께 따라다녀서 '노마(奴馬)'라는 합성어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말은 상당히 귀한 존재였다. 말을 관리하는 비용도 적지않게 들어 17세기에 이유태(李惟泰)가 '정훈(庭訓)'이라는 집안 살림살이 지침서에 남긴 글을 보면, 소 한 마리가 1년 동안 먹을 곡식으로 콩 한 섬을 준비해 두라고 한ㄴ 반면에, 말은 콩 두 섬에 좁쌀 열 말을 준비해 두라고 하였으니 유지비용이 소의 두 배가 넘었던 셈이다.

 

말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특별한 취급을 받아 발을 절거나 병에 걸리면 말에게 침을 놓아 주는 마의(馬醫)가 다로 있었다.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의학서적으로 '동의보감'이 있듯이 말을 치료하는 책으로 '마의보감(馬醫寶鑑)이 있을 정도였다. 좋은 말을 고르는 법, 말의 건강상태를 알아보는 법, 말을 치료하는 법 등을 수록한 말에 관한 백과사전으로 '마경(馬經)'이 있었고, 그 책의 분량이 너무 많아 이를 간단하게 요점만 추려 편찬한 '마경초(馬經抄)'가 있었으며, 이를 다시 일반백성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한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도 있었다. 말이 얼마나 특별히 취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국립중앙박물관

 

 

말은 키를 잴 때에 말굽에서부터 등줄기에서 목덜미로 넘어가는 부분에 불룩 솟은 뼈까지의 높이를 손바닥의 폭, 핸드(hand)로 재는데, 14.5핸드 이하의 말을 포니(pony), 즉 조랑말이라 부른다. 14.5핸드는 대략 1.5미터에 해당되는데, 우리나라 말은 10핸드 내지 12핸드의 아주 작은 조랑말이었다. 사실 키가 크고 늘씬한 말은 예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 흔치 않았다.

 

우리나라의 조랑말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예(濊)에서는 키가 석 자밖에 안되는 과하마(果下馬)가 있었다 하는데, 말을 탄 상태로 이마를 부딪히지 않고 과일나무 아래로 지날 수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04년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J. London)은 조선의 말이 어찌나 작은지 뉴펀들랜드산 개보다 조금 커서 자신이 안고 산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19세기 말에 고종의 행렬을 목격한 비숍(I. B. Bishop)은 고위관리들이 타고 다닌 말도 대개 조랑말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키가 큰 종마를 중국에서 수입하여 큰 말을 얻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랑말은 비록 왜소하지만 장점도 많았다. 사료는 적게 먹으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다니는 데는 아주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 조랑말/ⓒ나무위키

 

 

말 외에 타고 다녔던 동물로는 나귀와 노새가 있었다. 나귀는 말보다 기동성이 떨어지고 목덜미에 가까운 허리 쪽 힘이 말보다 약해 군용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다만 짧은 거리를 가는 데는 말보다 간편한 수단으로 종종 이용되었다. 나귀는 말에 비해 체구도 작아 볼품이 없어서 말보다 훨씬 값이 쌌다. "여각(旅閣)이 망하려니 나귀만 든다"는 속담은 예전부터 나귀가 값싼 돌물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래서 말이 부와 권세를 누리는 관리에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나귀는 검소한 선비에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관직에 오르기 전의 유생들이 나귀를 애용하였다고 한다.

 

한편 암말과 수탕나귀를 교접시켜 낳은 잡종노새나 암탕나귀와 수말을 교접시켜 낳은 버새는 2세를 낳지 못하는 동물이었다. 노새는 말보다도 훨씬 힘이 세어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데 자주 쓰였다.

 

말 외에도 소도 가끔 타고 다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세종 때의 맹사성(孟思誠), 효종 때의 김육(金堉)이 종종 소를 타고 다녔다 하며,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풍속화에는 소를 타고 장에 가는 아낙네가 종종 등장한다.

 

말이나 나귀는 남자들만 탄 것이 아니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사대붓집 여자들이 얼굴을 너울(羅兀, 나올)로 가리고 나귀나 말을 타고 바깥나들이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여자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풍경은 18세기 풍속화에도 등장한다.

 

연소답청(年少踏靑) 《혜원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여자들이 말을 탈 때에는 다리를 벌리고 말 등에 오르므로 속바지가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겉치마 위에 커다란 바지를 입고 말을 탔는데 그 겉바지를 말군(襪裙)이라 했다.

 

말군(襪裙) 《악학궤범》/ⓒ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여자들이 언제나 말군을 입고 말을 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세조 때 예조정랑 우계번(禹繼蕃)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는 취한 채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말을 타고 오는 영접도감사 조숙생(趙肅生)의 처가 말군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는 기생으로 오인하여 말에서 끌어내리고는 말채찍으로 때려 실신시킨 일로 유배된 일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함께보기 : 전통적 이동(운송)수단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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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에는 각종 양념이 들어간다. 고추, 파, 마늘, 새앙, 부추 등 경우에 다라 여러 가지가 조합되어 참가되는데, 이런 양념들은 우리에게 철분, 비타민, 칼슘을 제공한다. 특히 마늘은 쌀밥을 먹을 때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B1의 흡수를 도와 각기병을 막아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양념들이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파슬리, 로즈마리, 육두구, 정향 등의 향신료(香辛料)는 음식의 맛과 향을 돋우기 위해 넣는 첨가물로서, 전세계 여러 민족은 모두 자신들이 즐기는 향신료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에 썼던 향신료로는 마늘, 새앙, 겨자, 천초 등이 있었다. '산가요록(山家要錄,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요리서)'에는 이 밖에도 정가, 노야기, 분디나무 잎 등 다양한 향신료가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정작 가장 중요한 고추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추는 본래 감자, 옥수수처럼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건너온 식품이다. 다라서 신대륙이 발견되고 그곳의 물산이 아이사에 전해지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나라에서 고추가 전해지기 전까지 고춧가루의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 천초(川椒)가루이다. 천초는 그냥 초(椒)라고도 하며, 촉초(蜀椒)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산쇼(山椒)라고 부른다. 천초는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아직도 추어탕에 양념으로 쓰이고 있는데, 추어탕에 매운맛을 내는 짙은 갈색 가루가 바로 천초가루이다.


천초 껍질/ⓒ위키백과


천초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 자생하는 초피나무 열매 껍질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서 양념으로 쓰며, 쌉싸래하고 매운맛이 나는 향신료이다. 허균(許筠)이 지은 음식에 관한 책 '도문대작(屠門大嚼)(1611)에 '초시(椒豉)'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7세기에 천초로 고추장과 비슷한 형태의 장을 담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요록(要錄)'(1680년경)이라는 요리책에도 오이김치를 담글 때에 겨잣가루와 함께 천초가루를 양념으로 쓰고 있다.


초피나무/ⓒ위키백과


그러다가 고려 중기에 우리나라에 후추가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서역에서 온 물건에 호(胡)자를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서역에서 온 복숭아처럼 생긴 과일을 호두(胡桃)라고 했듯이 서역에서 온 초(椒)라는 뜻에서 호초(胡椒)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후추가 되었다.


후추열매/ⓒ학국학중앙연구원


후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입맛을 돋우는 최고의 향신료로 각광받았다. 유럽의 경우 오래 묵은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 주는 중요한 향신료로서, 멀리 인도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값이 상당히 비싸서 알갱이 수를 세어 팔 정도였다.


후추는 우리나라에는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처음 보이며, 신안 앞바다 해저에서 발견된 원나라 무역선의 물품 가운데에서도 발견된 일이 있다. 후추는 열대지방의 식물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므로 값이 상당히 비쌌다. 그래서 왕의 하사품으로 등장했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일본 사신이 잔칫상에 후추알을 뿌리자 조선의 악공(樂工)과 기녀들이 비싼 후추알을 줍느라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던 일을 소개하고 있다.


유구국(琉球國: 현 오키나와)에서 수입해 오는 후추 값이 너무 비싸고 또 구하기도 어려워서 조선시대 15세기에는 국내에서 재배하려는 노력도 해 보았으나 우리나라 풍토에 맞지 않아 실패했다. 결국 너무 비싸서 음식의 양념으로 쓰기에는 적절치 않아 약재로 많이 쓰였다. 때로는 더운 여름날 후추알을 갈아 물에 타서 마시며 갈증을 가라앉히기도 했으니, 쌉싸래한 맛이 지금의 탄산음료를 마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발발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해졌다. 고추라는 이름은 고초(苦椒)ㅇ에서 온 것으로, '매워서 열이 나는 초'라는 뜻이다. 고추는 일본에서 온 매운 식품이라는 뜻에서 왜겨자(倭芥子)라고 했고, 때로는 서양 오랑캐 남만(南蠻)에서 들여온 초라고 해서 남만초(南蠻椒), 번초(蕃椒)라고도 했으며, 매운 가지라는 뜻의 날가(辣茄)라고도 불렀는데, 실제로 고추는 멕시코 원산의 가짓과 식물이다.


고추는 아마도 1600년을 전후하여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추에 관한 기록은 1614년경에 편찬된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일종의 백과사전)에 처음 보인다. 그 측에 기록되기로는, 주막집에서 소주 안주로 고추를 놓았는데, 고추가 하도 매워서 그것을 먹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이야기로 생각되지만, 새로운 식품 고추가 주었던 강렬한 인상이 그렇게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추를 안주로 먹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당시 기록에도 고춧가루에 관한 내용은 없으므로, 그때의 고추는 말려서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어 양념으로 쓴 것이 아니라 통째로 그대로 식품으로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1670년경에 쓴 '음식디미방'에서도 마늘김치에 고춧가루를 양념으로 쓰지 않고 천초가루를 양념으로 쓰고 있다.


고추가 가루 상태로 양념으로 쓰인 것은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처음 보이며, 이때에는 고춧가루뿐만이 아니라 고춧가루로 고추장을 담가 먹는 만초장(蠻椒醬)도 등장한다. 이때부터 우리의 식생활은 엄청난 변화를 겼었다. 서양에서는 근대에 접어들어 일어난 식생활의 혁명으로 18세기의 감자, 포크, 개인접시를 들고 있지만, 우리나라 식생활의 혁명은 고춧가루의 사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추도 김치처럼 우리 식품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1980년대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 모든 음식이 빨간 것이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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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와 소금 또는 향신료만으로 만든 김치는 단백질의 부족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예전 김치에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한 다양한 김치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치에 육류를 넣은 것이다. 17세기 안동장씨의 '음식디미방'(1670년경)에는 생치김치, 생치지, 생치짠지라는 이름으로 오이김치에 ㅁ라리지 않은 꿩고기, 즉 생치(生雉)를 넣어 만드는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또 18세기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는 어육(魚肉)김치가 소개되어 있고, 19세기 빙허각(憑虛閣)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에도 어육김치와 전복김치가 등장한다. 어육김치는 대구, 북어, 민어, 조기 등의 대가리와 껍질을 모아 두었다가 김장 때에 김치에 넣는 것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말린 새우살과 같은 어패류도 김치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오이에 꿩고기를 넣어 담그는 꿩김치(생치김치)/ⓒ농촌진흥청


그런데 가장 널리 쓰인 단백질을 섭취하는 방법은 젓갈이다. 그래서 '규합총서'에서는 김치 담그는 법에 곤쟁이젓뿐 아니라 조기젓, 준치젓, 밴댕이젓, 굴젓 등 여러 가지 젓갈이 소개되어 있다. 많지는 않지만 김치에 새우젓을 쓰는 사례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19세기에 접어들어 어패류나 고기를 넣어 단백질을 공급하고 맛을 돋우는 고급 김치가 등장했고, 이때부터 젓갈이 김치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생선은 제철에 한꺼번에 많이 잡은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장하고 조리하여 먹었다. 크기가 커서 볼품이 있는 것은 식해(食醢)를 만들어 먹었다. 생선을 소금에 절이고 좁쌀 따위의 곡물을 첨가하여 발효시켜 먹는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등 여러 가지 식해가 동해안 지방에서 특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리고 크기가 작아 식해를 만들기 적합하지 않은 새우, 멸치 등은 젓갈을 담가 먹었다. 물론 조기젓, 밴댕이젓, 굴젓 등 크기와 관계없이 삭혀서 만든 젓갈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들은 액젓을 만들어 먹었다.


젓갈과 액젓은 김치에 첨가되어 김치의 맛을 좋게 하였다. 어패류를 소금에 절여 오래 묵혀 발효시키면 단백질이 차츰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고유의 맛과 향기를 낸다. 2,3개월 숙성시키면 생선뼈가 물러지고 분해되어 흡수하기 쉬운 상태의 젓갈로 변하여 특유의 맛과 향기를 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젓갈은 질 좋은 단백질과 칼슘, 지방질의 공급원이 되었다.


젓갈 가운데 새우젓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조기는 2,3개월 숙성시키면 조기젓이 되고, 1년 이상 숙성시키면 조기젓국이 된다. 한반도 남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멸치도 멸치젓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예전 문헌에 멸치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이지 않으므로 조선시대에는 김치의 젓갈로 많이 쓰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젓갈이 본격적으로 김치에 사용된 것은 고춧가루와 함께 18세기부터인 듯하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젓갈은 이미 15세기에 김치에 쓰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례가 많이 보이지 않아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고춧가루가 사용되면서 고춧가루가 젓갈의 산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자 적극적으로 김치 조리에 이용된 듯하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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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헌에 김치 제조법이 대강이나마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이다. 이규보는 여기서 순무를 여름 석 달 동안에는 장에 절여 먹고, 겨울 석 달 동안은 소금에 절여 먹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채소를 장이나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치를 소금에 절여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김치의 종류와 재료, 제조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요리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이 처음이다.


오이지/© 깊은나무-다음백과


'산가요록'에는 여러 종류의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순무김치[청침채(菁沈菜)], 오이김치[과저(瓜菹)], 가지김치[가자저(茄子菹)], 파김치[생총침채(生蔥沈菜)]는 물론이고 토란김치[우침채(芋沈菜)], 고사리김치[침궐(沈蕨)], 마늘김치[침산(沈蒜)] 등 여러 가지 김치 담그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여름에 속성으로 만들어 먹는 물김치[즙저(汁菹)], 겨울에 무를 이용한 동치미[동침(凍沈)]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15세기의 김치는 지금의 김치와 사뭇 달랐다. 우선 김치의 재료를 살펴보면, 지금은 김치의 가장 일반적인 주재료인 배추가 당시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농서(農書)나 요리서에서 채소 재배법이나 요리법을 소개할 때에도 배추는 오이, 무, 가지, 동아(冬瓜) 등에 비해 아주 소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고문헌에서 배추는 '숑(숭(崧)]', '숑채[숭채(崧菜)]' 또는 '배채[백채(白菜)]'로 기록되었는데, 16세기의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도 '숭저(崧菹)'가 보이고 '산가요록'에도 '배추김치 담그기'라는 뜻의 '침백채(沈白菜)'가 보이지만 단 한 번 등장 할 뿐이다. 이처럼 김치의 주재료로는 배추보다 오이, 가지, 순무, 동아, 파 등의 채소가 널리 쓰였다.


배추의 품종이 꾼준히 개량되어 제대로 결구가 된 품종이 생산되어 김치 재료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쯤으로 짐작된다. 1800년경에 간행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 오늘날의 배추김치와 같은 통배추김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과 추위에 강하면서도 맛과 질감이 좋은 배추가 만들어져 본격적으로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에 우장춘이 개발한 원예 1호, 원예 2호 배추부터였다.


순무/ⓒ위키백과


그리고 무도 지금과 같은 무가 아니라 순무 종류가 더 많이 쓰였다. 지금의 무는 '댓무'라고 하여 나복(蘿葍)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나박김치라는 말은 본래는 무김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댓나무보다는 청(菁)이라고 쓰는 '쉿무', 즉 순무가 더 많이 쓰였고, 기록에도 나복보다는 청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통상 김치라 하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것을 연상하지만, '산가요록'에는 과일도 김치의 주재료가 되고 있다. 즉 수박, 복숭아, 살구 등의 과일이 김채재료로 쓰인 것이다. 사실 과일과 채소는 식물학의 분류방법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즉 과학이 아니라 문화적인 분류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파파야를 익지 않아 파란 상태에서는 채소로 먹고, 노랗게 익으면 과일로 먹는다. 우리도 토마토를 굳이 채소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토마토는 과일일 뿐이다. 서양사람들은 토마토를 스파게티나 햄버거, 샌드위치의 재료로 쓰니까 채소라고 하지만, 우리는 토마토를 과일로 먹지 조리 재료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의 우리 조상들은 수박, 복숭아, 살구를 채소로도 썼던 것이다. 이때의 김치는 반찬으로 과일을 조리하기 위한 것으로도 쓰였지만, 과일을 오래 저장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전기의 김치에 대한 기록에는 젓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젓갈이 김치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전에도 젓갈이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세종 때에 기록에 어린 오이에 곤쟁이젓[자하해(紫蝦醢)]을 넣은 오이김치가 보이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譚)'이라는 책에서도 곤쟁이젓으로 담근 오이김치를 세상에서 '감동(感動)'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다. 흔치는 않지만 김치에 젓갈을 넣은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가요록'에는 곡물을 넣어 발효시킨 김치가 보인다. 여름에 물김치를 담글 때에 날콩이나 기울을 찧어 만든 덩어리를 가루를 내어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특별한 김치 외에는 거의 모든 김치에 고춧가루가 쓰이지만 이때는 양념 중에 고춧가루가 없다. 고추는 17세기에 도임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김치가 18세기에 접어들어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이고 젓갈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19세기에 배추김치가 크게 확산되면서 다른 나라의 김치와 다른 독특한 김치가 만들어졌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함께보기: 초기 김치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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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주자학이 도입되고 16세기에 주자학이 조선사회에 정착되면서 그 영향력은 가옥구조에도 미쳤다. 16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성리학적 질서와 윤리가 더욱 강화되면서 집의 공간 배치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로 남녀 사이에 엄격한 내외법이 적용되고, 양반가옥에서는 여성의 유폐(幽閉)가 이루어졌다.


여자는 중문 밖을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규모가 큰 양반집에는 여자들이 사는 안채와 남자들이 사는 사랑채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안채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살고 사랑채에는 아버지와 혼인한 아들이 살았다. 뒷간도 여성 전용의 안뒷간과 남성 전용의 바깥뒷간을 다로 두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16세기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똬리집 평면도/ⓒ네이버


일부지역에서는 양반집의 경우 구조도 폐쇄적으로 바뀌어 'ㅁ'자 집이 늘어났다. 예전부터 서울의 중인, 양반 집에서 'ㅁ'자 집을 지었던 주된 이유는 도성 안에 집 지을 공간이 넉넉지 ㅇ낳아 좁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으로 확산된 'ㅁ'자 집은 그렇지 않았다. 지방의 집들은 대개 한일자 모양이나 'ㄱ'자 모양의 고패집이 일반적이었는데, 'ㄷ'자 모양으로 바뀌거나 고패집이 'ㄱ'자와 'ㄴ'자 형태로 결합된 맞고패집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공중에서 지붕을 보면 완전히 폐쇄된 'ㅁ'자 형태의 집으로 바뀌었다. 이런 집을 경기도에서는 똬리집,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에서는 뙤새집, 경상북도에서는 뜰집이라고 불렀다. 그런 집들은 중문 안쪽의 안채공간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랑방은 주인남자의 기거공간이면서 한편으로는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대문을 들어선 외부손님이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중문을 들어가야 했다. 안채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중문을 열어도 바로 안채쪽이 보이지 않게 통로를 일부러 꺾어놓는다든지, 중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내외벽을 두어 안채를 가리기도 했다. 또 안채 뜰 한가운데는 사철 푸른 상록수를 심어 안채 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이렇게 안채를 가리는 풍속은 꽤나 철저해서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여류 지리학자 비숍(I.B Bishop)은 마을에서 어떤 집이 지붕을 고칠 경우에는 온 동네에 지붕을 고친다고 미리 알려야 했다고 전한다.


추사고택 평면도/ⓒ네이버


주인부부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아들딸의 공간도 분리되었다. "남녀가 일곱살이 되면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는 '예기(禮記)'의 가르침에 따라아이들도 딸은 안채에서 키우고 아들은 사랑채에서 키웠다.

 

엄밀한 내외법과 여성의 유폐는 부부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양반집에는 부부가 기거하는 방이 안채, 사랑채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있어서 태종 때 한성부(漢城府, 조선왕조 수도(首都)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에서는 부부가 같은 방에서 자지 말고 각각 다른 방에서 자도록 나라에서 강제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17세기까지만 해도 실제 부부는 같은 방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규모가 큰 양반집에서는 부부가 각각 다른 방에서 자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때문에 며느리가 기거하는 건넌방과 젊은 아들이 기거하는 작은사랑방을 연결하는 통로를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두어 몰래 성생활을 하게 되면서도 잠은 따로 자게 하는 특이한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유별난 내외법은 차츰 일반백성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세 칸짜리 집에서도 부엌에 달린 방은 여성의 기거공간이 되고, 또 하나의 방은 남성의 작업공간이 되었다. 때로는 툇마루로 이어진 두 방 사이에 벽을 쳐서 부부의 방을 상징적으로 분리시키기도 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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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촌의 초가지붕은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지붕형태였다. 그리고 산간지방에는 나무를 기왓조각 모양으로 잘라 지붕에 얹은 너와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럽 산간지방에도 있었고 지붕 위의 너와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을 얹어 놓는 방식도 똑같았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학기술과 산업의 성장이 미약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집을 짓는 재료를 채취하고 가공하여 운송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으므로 집짓는 재료는 언제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집짓는 주재료가 흙, 나무, 짚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흙은 어느 곳에나 있었고, 산이 많은 지형으로 인해 나무가 풍부했으며, 벼농사를 지어 먹고 살기 때문에 가을걷이 후에 부산물로 나오는 볏짚은 지붕으로 이는 데 쓰였다. 그 밖에 돌, 벽돌이나 기와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돌은 운반과 가공에 상당한 노동력이 들어가고, 벽돌이나 기와는 제조에 여러 공정이 필요한값비싼 건축자재였으므로 제한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초가지붕/경주 양동마을


기와지붕은 장식성이 높고 내구성이 좋아 위엄을 갖출 필요가 있는 관아나 절, 부자들이 집을 화려하게 지을 때 쓰였다. 게다가 기와지붕은 불이 나도 곧바로 큰불로 번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당시의 기와는 불에 구운 기와도 있었지만 진흙을 기포가 생기지 않게 단단하게 반죽하여 그늘에 말린 것이 많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더라도 기와를 만드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과 노동력이 들었다. 더구나 보온성이 좋지 않고, 여름에 비가 내리면 습기를 머금었다가 해가 비치면 습기를 내뿜어 방 안을 덥게 하므로 온습도 조절 기능은 오히려 초가집보다 떨어졌다.


조선시대 집의 지붕은 도시에서도 초가지붕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볏짚은 벼농사를 짓고 나면 손쉽게 얻을 수 있어 가장 값싼 재료였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개경은 물론이고, 조선 전기의 한양에도 기와집보다 초가집이 훨씬 많았다. 세종 때 도성 안 가호의 1/6에 해당하는 2,400호가 불타 버린 대화재가 일어나 이를 계기로 지금의 소방서와 같은 금화도감(禁火都監)이 창설되었는데, 이때 화재가 쉽게 번졌던 것도 도성 안에 있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느넫다가 대부분이 짚으로 지붕을 얹었기 때문이다.


초가집은 화재에 약하기는 하짐난 장점이 많았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훌륭한 보온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볏짚은 겉이 왁스 성분의 큐티쿨라(cuticula)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빗물이 떨어져도 미끄러져 흘러내리게 하여 두께 한 자 정도만 덮어도 지붕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짚은 속이 빈 대롱 구조로 되어 있어 뛰어난 보온성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지붕재료였다. 때로는 호박이나 박의 덩굴을 지붕에 올려 재배하기도 하여 마치 텃밭처럼 쓰이기도 하였으며, 두툼하고 둥굴게 덮인 초가지붕은 따스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집의 골격을 이루는 기둥, 창방, 보, 서까래, 도리에는 물론 나무를 썼다. 나무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재료는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대개 일정한 높이까지 곧게 자라고 대패가 잘 먹어 가공이 쉬우므로 최고의 건축재료였다. 그래서 모든 나무를 소나무와 잡목(雜木) 두 가지로 구분하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소나무가 배를 만들고 관청 건물을 짓는 데 요긴하게 쓰였으므로 함부로 베지 못하게 금송(禁松)정책을 펴서 특별히 관리했다. 안면도 등 몇 군데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소나무숲을 특별히 두어 재목을 조달하기도 했다.


초가집/경주 양동마을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나무가 쓰엿다. 벽은 대개 죄우의 기둥과 위아래 인방 사이에 나무막대로 세로로 중깃을 세우고 중깃 사이에 가로로 가시새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중깃과 가시새 사이에는 쪼갠 대나무나 수수깡, 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가로세로로 얽어 골조를 만들었다. 여기에 륵에 물을 붓고 짚을 썰어 넣어 이긴 진흙반죽을 붙여서 만들었다.

흙벽은 초가지붕처럼 보온성이 좋아 훌륭한 건축재료였다. 그러나 통풍이 중요한 창고 따위의 특별한 시설물에는 흙이 아니라 나무널을 이용하여 벽체를 만들었다.


흙은 이처럼 건물의 벽체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였다. 그뿐 아니라 구들 위의 바닥을 바르는 데도 쓰이고, 기와지붕을 일 때에 지붕을 이루는 널과 기와 사이를 메우는 재료로도 썼다.


담장은 싸리, 수수깡, 대 따위를 세운 바자울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진 집에서는 담을 쌓는 데 흙을 이용하여 토담을 만들었다. 중요한 건축물이나 부잣집의 경우에는 바닥에 장판을 하고 벽에 벽지를 발랐으나, 서민들의 집은 대개 바닥을 흙바닥 그대로 마감하고 자리를 깔고 살았다. 물론 벽은 벽지를 바르지 않은 흙벽 그대로였다.


집을 짓는 데 특징적인 것은 부재에 인위적인 가공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까래는 물론이고 가둥도 반드시 곧은 것만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기둥을 세우 ㄹ대에도 주춧돌을 매끈하게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그 위에 세울 기둥을 주춧돌의 울룩불룩한 면에 따라 깎아서 세우는 그렝이기법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정원을 꾸미는 데도 인위적인 가공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굳이 있다면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는 정도였다. 담장도 자연경관과 충돌하지 않게 나지막하게 쌓는 것이 원칙이었다. 동양 삼국의 미의식은 각자 개성이 있어서, 중국은 정교하고 화려하며 장대한 것을 즐기고, 일본은 작은 규모로 절제되고 적막한 긴장감의 미학을 즐기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인위적인 것이 지나치게 가미되지 않은 자연스럽고 개방적이며 투박하고 활달한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집의 건축양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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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편으로는 자연환경과 어울리게 지어야 하고, 좋은 자연환경을 찾아 지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연환경의 악조건을 이겨 낼 수 있게 지어야 했다.


좋은 자연환경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집터를 찾아야 했다. 그때 활용된 것이 풍수지리였다.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듯이 풍수지리에 비합리적인 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좋은 자연환경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풍수에 좋은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집 주변 산세의 모양을 가리키는 형국(形局), 집의 방향을 가리키는 좌향(坐向), 집 자리를 가리키는 혈(穴) 등 꽤 복잡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그런데 풍수(風水)라는 것은 본래 '장풍득수(藏風得水)'를 가리키는 것으로, 장풍은 찬바람이 휘몰아치지 않아 추운 겨울을 나기에 족한 조건을 가리키며, 득수는 농사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을 가까운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건을 가리킨다. 풍수에 맞는 조건이란 결국은 살기 편한 자리였다.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뒤쪽에 산이 있고 앞쪽이 낮아 물이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을 길지로 여겼다. 이 역시 생활의 편리성과 관계가 깊다. 주변은 거센 바람이 몰아치지 않도록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앞은 시원스럽게 탁 트였으며, 볕이 잘 드는 곳이 바로 풍수에 맞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배산임수는 생활필수품을 쉽게 조달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는 매일 길어 와야 했고, 때로는 냇가에 나가 빨래를 해야 했다. 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고 구들을 데우기 위해서는 나무를 해야 했다. 물과 나무를 가까운 데서 쉽게 구하기 위해서는 배산임수의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집은 자연환경을 극복하여 살기 편한 곳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집의 구조는 기후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강우량, 강설량, 일조량, 바람, 습도, 지형 등 모든 것이 집의 모양과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는 지붕의 물매가 가파르며, 햇볕이 강한 곳에서는 창살이 촘촘하다. 바람이 강한 곳에서는 지붕을 묶어 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기왓골의 깊이까지도 비가 많은 곳에서는 깊다. 길게 앞으로 뻗은 처마도 비가 안으로 들이치지 않게 하고 뜨거운 햇볕을 막아 방 안을 서늘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가옥구조 중에 기후와 관련하여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마루와 온돌이다. 대청, 안청, 마래라고도 부르는 마루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벌레를 차단하고 통풍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시설이다. 남쪽 지방에서 발달한 마루는 덥고 습한 기후를 이겨 내려는 노력과 지혜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더위와 습기보다는 추위를 막는 것이 더 중요했던 평안도, 함경도 지역의 민가에는 마루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함경도의 집은 양통집이라 하여 한 용마루 아래에 간격을 두지 않고 앞뒤로 방을 배치했다. 이는 추운 지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방 안의 열을 최대한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 부뚜막/ⓒ국립중앙박물관


한편 우리 주거생활의 특색을 이루는 구들 또는 온돌(溫突)이라는 난방법은 일찍이 고구려의 서민가옥에서 유래되었다. 온돌이 언제부터 일반화되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지만, 처음에는 서민들의 난방법이었던 온돌이 전국적으로 전 계층에 일반화된 것은 조선 후기로 보인다.

처음 온돌은 방 전체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 일부를 데우는 '쪽구들' 형태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에는 대개의 경우 부엌의 부뚜막에 불을 때어 밥을 짓고 물을 끌이면서 동시에 온기가 방바닥 밑을 지나게 하여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이는 적은 연료로 장시간 실내를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난방법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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