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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57호, 무령왕비 금귀걸이/국립중앙박물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비 금귀걸이'는 6세기 백제시대 유물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의 무덤으로써 1971년에 처음 발굴이 진행되었는데, 벽돌로 만든 무덤에서는 금제관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국보 157호로 지정된 '무령왕비 금귀걸이'는 모두 네쌍이 출토되었으며, 머리쪽에서 출토된 두쌍은 중심고리, 중간장식, 끝장식 등을 갖추었고, 발치 쪽에 출토된 두쌍은 중심고리와 끝장식만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머리 쪽에서 출토된 것은 노는 고리에 2점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는데, 길쭉한 귀걸이는 영략을 붙인 사슬모양 연결 금구에 현재의 총탄과 흡사한 모양의 끝장식을 매달았다.

짧은 귀걸이는 중간 장식으로 투작 반 구체를 덮어씌운 담녹색 유리구슬을 사용했으며, 사슬형 금구에 사익형의 끝장식을 연결했다.

한편 발치쪽에서 출토된 것은 왕비의 발치 북쪽에서 팔찌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크기는 아주 작으며, 중심 고리에 금실을 두 번 감은 다음 횡으로 두세 번 감아 마무리를 한 것이 특징이다.


전체 길이 1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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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관꾸미개(은화관장식)/국립부여박물관]



[백제 관꾸미개(은화관장식)/국립부여박물관]


[백제 관꾸미개(은화관장식)/국립부여박물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능안골 고분군(공설운동장부지)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은화관장식 유물은 은으로 된 판의 가운데를 접어 꽃봉오리와 줄기모양으로 좌우대칭이 되도록 오린 것으로, 남자는 줄기에 곁가지가 장식된 것을 착용했으며, 여자는 곁가지가 없는 단순한 모양의 꾸미개를 착용하였다고 한다.

줄기의 밑부분을 머리에 쓰는 관모의 정면 테두리 부분에 꽂아 장식하였으며, '수서(隋書)','구당서(舊唐書)' 등에 나와있는 '백제의 나솔 이상은 은꽃으로 관을 장식한다.'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은화관장식은 실제로 사용되었던 관모 장식이다.


세로 길이 2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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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면제갑옷/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면제갑옷/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면제갑옷/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면제갑옷/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면제갑옷/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면제갑옷/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후기 총탄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갑옷으로 등록문화 4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면제갑옷은 면을 여러 겹 겹쳐 만든 갑옷으로 탄성이 큰 섬유조직을 이용해 총탄을 방어하는 원리가 적용된 면으로 만든 갑옷이다.

무명을 30장 이상 겹쳐 만들었는데, 안쪽에 소유자의 성명으로 추정되는 먹으로 쓴 글씨가 남아있는데, '공군옥(孔君玉)'이라고 쓰여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전해오는 면제갑옷으로 우리나라 갑옷 발달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물이며, 군사사적, 사료적 가치 또한 큰 갑옷 유물로 평가받는다.


면제갑옷 크기 가로 100cm, 세로 1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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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9호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9호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9호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9호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9호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는 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순금제 버클로 국보 89호이다. 낙랑 유물 중 단연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는데, 타출된 금판 위에 미세한 금 알갱이와 가는 금사를 누금기법으로 붙이고 그 위에 푸른 옥을 박아 화려한 장식을 추가했다.

주요 문양으로 가운데에 큰 용 한 마리가 있고, 큰 용 주변부에 작은 용 6마리가 각각 배치되어 있으며, 용의 윤각선은 비교적 큰 알갱이를 붙여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띠고리 전체에 모두 41개의 청록색 터기석을 붙여 장식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지만, 현재는 7개만 있고, 왼쪽에 뚫려있는 호형의 구멍은 띠를 넣은 곳이고, 가로지르는 순금제 교침을 통해 띠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띠고리의 총 길이는 9.4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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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립중앙박물관]


[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립중앙박물관]


[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립중앙박물관]


[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립중앙박물관]


[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립중앙박물관]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백제 금동관으로 국보 295호이다. 신촌리 금동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이는 형식으로 만들었으며, 겉면에는 인동문을 테두리로 구획하고 그 안에 여러 개의 꽃모양 장식을 만들어 놓았다.

외관은 관테의 앞면과 옆면에 하트형의 끝장식이 있는 풀꽃 모양의 세움 장식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는데, 관테의 윗면과 솟은 장식의 앞면에는 달개가 달려있어 신라의 관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지만, 머리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관의 뫼산(山)자 모양과는 다른 복잡한 풀꽃 형상을 하고 있어 확연히 구분 된다.


금동관 높이 18.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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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금허리띠/국립중앙박물관]


[금관총 금허리띠/국립중앙박물관]


[금관총 금허리띠/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에 출토된 국보 88호 금허리띠는 신라시대 유물로, 얇은 금판으로 제작된 40매의 허리띠꾸미개와 허리띠고리, 허리띠끝장식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금허리띠 그리고, 금허리띠에 화려하게 달려 있는 총 17줄의 허리띠드리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허리띠꾸미개는 혁대에 고정되는 사각형 판에 심엽형(풀이나 나무 우듬지의 가운데에서 돋아 오르는 잎 모양) 장식이 달려 있으며, 금판 위에 인동무늬를 간략화시킨 세잎무늬를 표현했고, 둥근 달개를 금실로 꼬아서 매다는식으로 보다 화려하게 보이도록 한 것이 특징입니다.

허리띠드리개는 타원형 판과 방형 판을 교대로 연결했는데, 가장 긴 것은 타원형 장식이 10개로 구성되어 있고, 끝에는 3개의 방울이 매달려 있습니다.

나머지 장식 가운데 13줄은 3개의 타원형 장식과 5~6개의 방형장식을 연결했으며, 맨 아래에 곱은옥, 용무늬 맞새김장식, 물고기장식 등이 매달려 있습니다.

나머지 3줄은 사슬과 속이 빈 금구슬을 사이사이에 연결해 드리웠으며 끝부분에는 향주머니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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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갑주(갑옷)/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갑주(갑옷)/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갑주(갑옷)/국립중앙박물관]



가까운 일본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조선시대 갑옷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예가 많지 않다. 제작 시기가 18세기 경으로 보이는 이 갑옷은 안쪽에 일정한 크기로 작게 만든 가죽 비늘을 붙여 만든 피갑(皮甲)이다. 갑옷의 겉면 원단에는 식물문양(또는 모란당초문이)이 그려져 있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쇠징이 박혀있다. 갑옷의 안감 뒷면에는 '김치형(金致衡)' 이라고 추정되는 글씨가 남아 있으며, 가죽 비늘의 한 조각에 '권명현(權命賢)'과 '박종후(朴宗後)'라고 하는 이름이 새겨져 있은 것으로 보아 이 갑옷을 사용하던 주인 또는 갑옷을 만든 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갑옷 길이: 105.5cm, 갑옷 너비: 96.8cm

투구 길이 46.8cm, 투구 너비 7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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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총 금귀걸이/국립중앙박물관]


[부부총 금귀걸이/국립중앙박물관]


[부부총 금귀걸이/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0호 부부총 금귀걸이는 1915년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합장분의 돌방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금으로 된 작은 알갱이와 금실을 이용해 정교하게 장식하였고, 화려한 모양의 달개가 특징이다. 부부총 금귀걸이는 삼국시대 귀걸이 중 단연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보물로, 천 오백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반짝거리는 황금색과 화려한 무늬는 신라인의 금속공예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름 0.5mm도 채 되지 않는 수백 개의 금 알갱이를 얇은 금실로 거북등 모양으로 구획을 나누고 다시 그 안에 정교한 꽃무늬를 표현했다. 샛장식은 작은 고리로 연결해 둥근 형태로 만들었으며, 가장자리에는 37개의 나뭇잎 모양의 달개를 달아 풍성하면서도 화려해 보이도록 했다. 또한 나뭇잎 모양의 달개 장식이 끝나는 아래쪽에는 나뭇잎 모양 보다 큰 하트모양의 장식을 매달아 조형미를 더했다. 부부총 금귀걸이는 5세기 부터 이어져 온 신라 귀걸이 제작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물로 이와 유사한 금귀걸이로는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귀걸이(보물 557호)와 양산 금조총에서 출토된 귀걸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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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비 은팔찌,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비 은팔찌,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비 은팔찌는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름 8cm의 은으로 만든 팔찌로 국보 160호이다. 팔찌의 둘레에는 머리를 뒷쪽으로 돌리고 발이 3개인 두 마리의 용이 장식되어 있다.

팔찌의 안쪽에 [경자년(庚子年, 520년) 2월에 '다리'라고 하는 장인이 대부인(大夫人, 왕비)을 위해 230주이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更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十世主耳)]고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경자년은 왕비가 죽은 병오년(丙午年, 526년) 보다 6년 전으로, 230주이(二百世主耳)는 무게 단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부인(夫人)이라는 호칭은 왕비나 왕모, 그리고 상류층의 혼인한 여자를 이르는 말로, 무령왕비 은팔찌는 왕비를 위한 것이므로 특별히 대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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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금제관식/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 금제관식/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 금제관식은 국보 154호로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고분군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높이 30.7cm, 너비 14cm 크기의 백제시대 유물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재위기간 501년~523년)과 왕비의 무덤으로 1971년에 처음으로 발굴되었는데, 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 내부에서는 금제관식 등을 비롯해 많은 백제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령왕 금제관식은 출토 당시 왕의 머리 부분에서 거의 포개진 형태로 발견되었으며, 전체적으로 금으로 된 얇은 판을 인동당초문(인동초 모양)과 화염문(불꽃 모양) 을 조화시킨 형태로 만들었으며, 좌우 비대칭 형태로 한쌍이 함께 머리 장식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중국의 '구당서'에 백제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 라는 기록이 있다.) 줄기 부분과 꽃 모양 부분에는 지름이 5mm 정도의 작고 둥근 원판 형태의 영락을 달았는데, 작은 구멍을 뚫고 금실로 4~6회 꼬아서 꿰어 메단 형태의 영락은 그 숫자가 127개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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