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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정종 3)~1031(현종 22). 고려 현종 때의 장군.

1010년과 1018년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특히 우리나라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구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본관은 금천(衿川).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헌복시(任軒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그뒤 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고, 1018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했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조정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이에 놀란 조정의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은 이를 반대하고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왕을 나주로 피신하게 했다. 왕의 피신중에 양규(楊規)가 곽주(郭州)에서 적을 무찌르고, 하공진(河拱辰)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고려는 항복의 치욕을 면하게 되었다.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현종이 친히 조회(朝會)하지 않은 것과 강동(江東) 6성을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 : 지금의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 : 지금의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다. 침략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니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했다. 거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검교태사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文宗)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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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의 길 - 이순신 일본침략에 대비하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음력)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나,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어려서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28세가 되던 1572년 8월 처음으로 무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사고로 낙방하였고, 4년 뒤인 1576년 2월 비로소 식년무과에 합격하였다. 32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시작된 이순신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고,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하여 상관들로부터 잦은 모함과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순신이 정읍현감을 거쳐 1591년 2월 유성룡의 추천으로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거북선과 판옥선, 지자와 현자총통 등의 무기를 제작하였다. 특히 조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은 적의 월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둥근 지붕에 못이 박혀있고, 전우좌우 사방에서 대포를 쏠 수 있어서 수많은 적선 사이에서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전선이었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하루 앞둔 1592년 4월 12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나대용이 거북선 제작을 완료하고 거기서 지자와 현자총통의 시험 발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발발 - 조선수군 일본의 발목을 잡다.
1592년 4월 13일(음력) 마침내 이순신이 우려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수십만 대군의 일본군이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을 일시에 침략한 것이다.

전쟁발발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만전의 준비를 한 후, 1592년 5월 4일 첫 출전을 한다. 이 출전에서 그는 옥포, 합포, 적진포 지역에서 해전을 치러 총 42척의 왜선을 격파하며 승리하였다. 이어서 6월 당포. 당항포에서, 7월 한산도, 안골포에서, 9월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여러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하였다. 이러한 이순신 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는 조선 수군의 사기를 진작하였고, 결국 조선 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개전 이 후 거침없이 공격해오던 일본군의 전략(수륙병진)에 큰 타격을 주어 전쟁의 방향을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세계 4대 해전으로 손꼽히는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은 조선 총통과 전선의 우수성, 이순신 특유의 창의적 전술인 ‘학익진’을 사용한 전투로 해군 수장으로써 이순신의 뛰어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투이다. 1593년 8월 15일, 이순신은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조선 수군의 잇따른 해전 승리, 의병들의 출현, 명나라 군대의 참전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일본은 강화 교섭 자체를 반대하는 조선을 배제시킨 채, 전투에 소극적인 명나라와 약 3년 9개월 동안 지루한 강화협상을 전개해 나간다. 이순신은 이 기간 동안에도 군량 확보, 병력 충원, 전함 건조, 무기 제작 및 화약 비축, 군사 훈련 등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특히 전염병과 군량미 부족이라는 악조건과 싸우며 해상 작전을 수행해나갔는데, 1594년 3월 난중일기에는 장군도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고생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군량확보를 위해서 과거 둔전관의 경험을 살려 둔전을 경영했으며, 어로작업과 소금제작으로 수만 석의 군량을 마련하는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고난의 길 - 13 VS 133 명량해전 승리로 다시 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은 이러한 모든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1597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위기에까지 몰린 이순신은 결국 여러 사람들의 구명운동으로 방면되나, 두 번째 백의종군에 처하게 된다. 더욱이 이 기간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한편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1597년 7월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한다. 3년 9개월 동안 이순신이 각고의 노력으로 이룩해놓은 조선수군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패전 소식은 곧 이순신에게 전해졌고, 장군은 즉시 조선 수군 부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한 달에 걸친 해안지역 정찰에 나선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남해지역을 직접 돌아보며 흩어졌던 장병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무기와 군량미를 모았다. 1592년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는 교지를 받게 된다.

이순신에게는 13척의 판옥선만이 남아 있었다. 명량해전은 이러한 이순신의 함대가 수백 척의 적선과 맞서 싸운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지형을 활용하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였고,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 함대를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결국 133척의 적선과 맞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조선수군은 칠전량해전의 승기를 타고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을 막아내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이 해전으로 셋째 아들을 잃게 된다. 패배한 일본군이 이순신의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쳐들어가 보복한 것이다.

이 후로 이순신은 고하도, 고금도로 차례로 진영을 옮기면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8000여명의 병력과 53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 일본은 철군을 서두르게 된다.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 진정한 영웅 이순신 길이 살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는 1598년 11월 노량 앞 바다에서 퇴각하는 일본군과 마지막 해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치열한 전장의 선상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가는 중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애국심과 우수성을 떨친 마지막 해전이었으며, 조선 수군이 주도했던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였다.

이순신은 7년의 임진왜란 기간 동안 최소 23전 이상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훌륭한 장수였다. 그러나 단지 싸움에만 능한 장수가 아니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바쳐 끝까지 백성과 나라를 사랑한 진정한 리더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오늘날에도 이순신을 가장 사랑하고 닮고 싶어 하는 영웅으로 꼽는다.

장군의 정신



정의실천

이순신 장군은 일평생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관으로서 항상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상관이나 권력자에게도 서슴없이 오류를 지적하는 직언을 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여러 차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늘 정의를 삶의 핵심가치로 삼고 온전히 실천하였다.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장군은 타인보다 본인에게 더 엄격하였다. 다음 글은 1593년 웅천포 해전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통선 1척을 잃은 것에 대해 장군 스스로 죄를 청하는 장계의 한 부분이다. 사실 이 통선이 전복된 원인은 부하장수들이 장군의 지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나 장군은 지휘관으로써 본인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통선(統船) 1척을 마침내 전복시켜 많은 죽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이 군사 쓰는 방법이 좋지 못하고 지휘가 잘못된 때문인바, 극히 황공하여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리나이다." -통선일척경복후대죄장(1593.4.6)

또한 장군은 해전에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부하장수들에게 골고루 주고, 이를 엄격히 평가하여 해전의 상황을 아뢰는 장계에 상세히 기록함으로 각자 공적에 따라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당시 천대받던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까지도 고루 기용하고, 이들의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의 군관 정사준이 묘한 법을 찾아내어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삿집 종 안성, 피난하여 본영에 와 사는 김해 절의 종 동지, 거제 절의 종 언복 등을 데리고 정철(正鐵)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그 체제도 잘 되었고 총알 나가는 힘도 조총과 꼭 같습니다." -봉진화포장(1593.8.10)

1593년 8월 일본의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개량하여 정철총통을 제작을 아뢰는 장군의 장계에는 군관 정사준을 비롯하여 대장장이와 천민인 종들의 이름까지도 세세히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군은 일평생 본인의 신념에 따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의로써 타인을 평가하기에 앞서 장군 스스로 온전히 정의를 실천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구국의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준 동시에, 장군의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창의정신

창의력은 21세기의 핵심 가치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온 많은 리더들은 이미 훌륭한 창의력의 소유자들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16세기 이순신 장군 역시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리더였다. 거북선을 비롯한 장군이 제작한 여러 무기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해전술, 군경영을 위한 작은 아이디어 하나까지 모두가 장군의 기발한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거북선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13년 태종 때이지만, 180년 후 임진왜란을 위해 재탄생된 거북선과는 구조나 그 성능 면에 있어 많이 다른 것이었다. 다음은 1592년 6월 2일 당포해전의 전황을 아뢰는 장계에 묘사된 거북선의 모습이다.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 하더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는데, 이번 출동에는 돌격장이 타고 왔습니다." -당포파왜병장 1592.6.14

돌격전투함 거북선은 우수한 조선의 판옥선을 기반으로 일본과의 해전에 가장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다. 전투 시 적진에 돌격하여 적의 진영을 무너트리고, 사방에 탑재된 포를 자유자재로 쏘아댐으로 일본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은 이 같은 거북선을 맹선(눈먼배)이라 부르며 무척 두려워하였다.

이후로 계속되는 해전 중에도 장군은 일본의 주력무기인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접목하여 1593년 8월 새로운 정철총통을 제작하는 등 계속적으로 신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장군의 창의력은 전쟁기간동안 군경영의 큰 자원이 되어주었다. 7년의 전쟁기간동안 장군은 수군의 의식주를 위한 군량확보, 무기제작과 훈련 등 군경영에 필요한 모든 재원을 거의 자력으로 해결해야했다. 이를 위해 장군은 어로작업, 소금제조 및 판매, 둔전경영, 해로통행첩(선박운행증) 발행 등의 창의적인 여러 행정을 편다.

특히 과거 둔전관의 경험을 살린 둔전경영을 통해서는 군량미를 확보하는 동시에 유랑하는 백성들을 둔전 지역으로 모아 병력 충원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다음 글은 이순신 장군이 둔전경영을 건의하며 그 이로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군사들의 양식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중략) 관경 경영으로 경작하든지, 혹은 민간에 주어서 소작을 시키든지, 혹은 순천. 흥양의 수비군들로 하여금 전력하여 농사짓게 하다가 사변이 생길 적에는 나가 싸우게 한다면 싸움에나 지킴에나 방해됨이 없고 군량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조진수륙전사장. 1593.9.10

창의력은 약점을 강점으로, 위기를 기회로, 무에서 유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여,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켜냄으로 세계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불패의 해전사

이순신 장군은 첫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7년의 임진왜란기간 동안 최소 23번의 해전을 치러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장수이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기록이다.

어떻게 이런 불패의 신화가 가능했을까?

철저한 준비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한다. 해전에 알맞은 방법을 개발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적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무기를 제작한다. 화력이 우수한 조선의 지자. 현자 총통 및 판옥선과 거북선 등의 무기를 집중하여 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 정신으로 장군은 매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일본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사상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뛰어난 전략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꾸게 한 1592년 7월 8일의 한산도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해전이다. 당시 70여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던 견내량은 지형이 복잡하고 좁아서 아군에게 불리한 장소였다. 장군은 이 점을 간파하고 적선을 한산도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무방비상태의 적을 "학익진법"으로 집중 공격함으로 대승을 거둔다. 한산도 해전은 뛰어난 전략가로써의 장군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전투였다. 장군은 항상 부하장수들과 전략과 전술을 논의하고 연구하였다. 동서양의 해전 연구가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해전술을 칭찬하며 연구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함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난 후 이순신 장군은 실제 전투에 누구보다 용감하게 최선을 다해 참여하였다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을 맞아 싸운 명량해전의 일화는 유명하다. 엄청난 적 앞에 조선수군의 장수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싸움을 망설이자, 장군은 부하장수들을 꾸짖으며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함대의 선두로 나아가 전투를 이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에 조선수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였으며 마침내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전투에서 항상 솔선수범하여 최선을 다하는 장군의 모습은 많은 부하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그들 또한 장군처럼 전투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임하기전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 전투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줌으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불패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기록정신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전해 줄뿐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때문에 올바른 역사기록을 남긴 인물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을 하는 셈이다.

이순신 장군은 무관임에도 이러한 선물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한 사람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 까지 약 7년간 진중에서 직접 일기를 기록하였다. 이렇게 기록된 난중일기와 임진왜란 해전상황을 아뢰는 장계초안인 임진장초는 유성룡의 징비록, 선조실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사투를 넘나드는 전쟁 속에서 장수가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놀라운 기록정신을 가진 장군은 이렇게 훌륭한 기록을 남겨 주었다.

난중일기에는 진중 일기답게 전라좌수영 및 통제영의 군영생활, 여러 해전의 군사전략과 해전상황기록,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 등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장군의 감정과 생각이 담백하게 기록되어 있어 인간 이순신의 사상과 면모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최고의 자료가 되고 있다.

매년 1권씩 작성된 7권의 난중일기는 임진장초, 장군의 편지를 모은 서간첩과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현대에도 이순신 장군의 문집은 다양하게 편집, 출판되어 장군을 연구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나라사랑, 백성사랑

32세에 무관의 길에 들어선 이순신 장군은 국토수호 및 나라사랑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변방의 작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 는 조선 수군의 수장으로서 나라의 바다를 목숨걸고 지켜내었다.

무관으로써 장군의 나라사랑 길은 평탄치 않았다. 상관들의 모함으로 파직과 백의종군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해전에서 연승하며 위기의 나라를 구해내는 큰 공을 세우지만, 죄인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힘든 시련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장군은 1598년 11월 퇴각하는 일본군을 맞아 노량해전 선상에서 전사하기까지 나라사랑을 굳건히 실천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굳은 나라사랑은 또한 백성사랑으로 이어진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장군은 항상 백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난중일기를 비롯한 여러 관련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견내량파왜병장, 7월17일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은 역사적인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장군은 전투 중에 적선을 모두 파괴하지 않고 한 두 척을 남겨두는데, 이는 도망할 곳 없는 적들이 우리 백성들을 살육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여러 차례 목격된다.

다음은 명량해전을 앞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을 먼저 안전하게 피난시키는 장군의 모습이다.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띄워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어서 뭍으로 올라가도록 타이르라고 하였다." -난중일기 1597.9.13

3일 후 조선수군은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과 맞서 싸우는 명량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재건, 나아가 나라의 존폐가 걸린 중요한 전투였다. 장군은 이렇게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도 백성을 먼저 생각한 것 이다. 이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이 후로도 이순신 장군은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이들이 군의 보호 아래 어로와 농사를 통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등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돌보았다.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장군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보는 실천적인 나라사랑의 삶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명언 / 시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옥포 앞 바다에서 첫 해전을 앞둔 조선 수군 장수들에게 신중하고 침착하게 전투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이자, 조선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옥포파왜병장, 5월 10일 기록)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사옵니다"

원균 휘하의 조선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거의 전멸하자, 선조는 “수군을 파하고 육전에 힘쓰라”는 교서를 내린다. 그러나 이순신은 수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 수군이 존속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 후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1척의 배를 더 추가하여,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적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다. (이충무공행록 기록)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큰 해전을 치러야 하는 수군의 장수들에게 굳은 정신력을 가지고 싸움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 다음 날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은 위와 같은 결사의 정신으로 전투에 임하여, 13대 133이라는 엄청난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다.(난중일기 1597. 9.15 기록)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 1598년 11월 19일 퇴각하는 적과 노량 앞바다에서 대전을 치르는 선상에서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며 곁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위와 같은 말을 유언으로 남긴다.(이충무공행록 기록)


한산도가(閑山島歌) (난중일기)

閑山島月明夜 上戍樓: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憮大刀 深愁時: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何處一聲羌笛 更添愁: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남의 애를 끓나니


한산도 야음(閑山島夜吟)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
驚寒雁陣高(경한안진고) :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하늘 높이 날아간다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자는 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 새벽달은 무심코 활과 칼을 비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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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B.C.)
약70만년전 구석기문화 
6000  신석기문화 
2333  단군, 아사달에 도읍,  
        고조선 건국 (삼국유사) 
1122  8조금법(八條禁法) 제정
1000  청동기문화의 전개, 고조선의 발전 
800년 고조선의 수도 : 왕검성 
300  철기문화의 보급 
194  위만, 고조선의 왕 
108  고조선 멸망, 한(漢)사군 설치 
 59  해모수 북부여 건국 
 57  신라 혁거세 거서간 즉위 
 37  주몽 고구려 건국 (~A.D. 608) 
 28  고구려 부위염, 북옥저 병합 
 18  온조 하남위례성 백제 건국(~A.D. 660) 
  5  백제, 한산(漢山)으로 천도
 
기원후(A.D.)
   3 고구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 
   8 백제 마한 병합  
 42 김수로왕 금관가야 건국 
194 고구려 진대법 실시 
209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 
260 백제 고이왕 16관등과 공복 제정
313 고구려 낙랑군 멸망시킴 
372 고구려 불교전래, 태학설치 
      백제, 동진에 사절 파견 
384 백제 불교 전래
427 고구려 평양 천도 
494 부여 고구려에 복속
502 신라 우경 실시 
503 신라 국호와 왕호 정함 
512 신라 이사부 우산국 정벌 
520 신라 율령 반포, 백관의 공복 제정 
527 신라 불교를 공인, 이차돈 순교 
532 금관가야, 신라에 항복하여 멸망 
536 신라 연호 사용 
538 백제 사비 천도 
562 신라 대가야 멸함 
576 신라 원화(源花)제도 시작 
598 고구려 수문제 30만 대군 침공
612 고구려 을지문덕 살수대첩 (수나라) 
645 고구려 안시성 싸움 승리 (당나라) 
646 고구려 천리장성(千里長城) 완성 
660 백제 멸망 황산벌전투 
668 고구려 멸망 (나당연합군) 
676 신라 삼국통일 
685 9주 5소경 설치 
698 대조영 발해의 건국
722 신라 정전 지급 
723 혜초 왕오천축국전 
788 독서 삼품과 설치
828 장보고 청해진 설치
900 견훤 후백제 건국 
901 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 왕건 고려 건국(~1392) 
926 발해 멸망 
935 신라 멸망 
936 고려 후삼국 통일 
956 노비 안검법 실시 
958 고려 과거제도 실시 
976 전시과 실시
1009 강조의 정변 
1019 귀주대첩 
1033 고려, 천리장성 축조(~1044) 
1076 전시과 개정, 관제개혁 
1097 주전도감 설치
1107 윤관 여진정벌 
1126 이자겸의 난 
1135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1170 무신정변 
1196 최충헌의 집권 
1198 만적의 난
1219 몽고와 통교 
1231 몽고의 제1차 침입 
1232 강화 천도 
1270 개경으로 환도, 삼별초의 대몽항쟁 
1274 여, 원 제1차 일본원정
1359 홍건적의 침입(~1361) 
1376 최영 왜구정벌 
1377 최무선 화통도감 설치 
1388 위화도 회군 
1389 박위 쓰시마 섬 정벌 
1392 고려 멸망, 조선 건국 
1394 한양 천도
1402 호패법 실시, 무과 설치 
1403 주자소 설치 
1411 한양에 5부 학당 설치 
1418 세종대왕 즉위 
1433 4군 설치 
1437 6진 설치 
1443 훈민정음 창제 
1466 훈민정음 반포, 직전법 실시
1510 3포 왜란 
1512 임신약조 
1519 향약 실시 
1554 비변사 설치 
1555 을묘왜변 
1592 임진왜란, 한산도대첩 
1593 행주 대첩 
1597 명량해전 승리
1608 경기도에 대동법 실시 
1609 일본과 기유약조 체결 
1623 인조 반정 
1624 이괄의 난 
1627 정묘호란 
1628 벨테브레, 제주도 표착 
1636 병자호란 
1653 하멜, 제주도 표착 
1678 상평통보의 주조 
1696 안용복, 독도에서 일인 쫓아냄
1708 대동법 전국 실시 
1712 백두산 정계비 건립 
1725 탕평책 실시 
1784 이승훈의 천주교 전도 
1785 대전통편 완성 
1786 서학을 금함
1801 신유박해 
1811 홍경래의 난(~1812) 
1839 기해박해
1860 최제우, 동학 창시 
1862 임술민란 
1863 고종즉위, 흥선대원군 집권 
1866 병인박해, 병인양요 
1871 신미양요 
1875 운요 호 사건 
1876 강화도 조약 체결 
1881 신사유람단 및 영선사 파견, 
     별기군 창설 
1882 임오군란, 
     미.영.독 등과 통상조약 체결 
1883 전환국설치, 태극기 사용 
1884 우정국 설치, 갑신정변 
1885 거문도 사건, 배재학당 설립, 
     서울-인천 간 전신개통, 광혜원 설립 
1886 이화학당 설립 
1889 함경도에 방곡령 실시 
1894 동학 농민운동, 갑오개혁 실시 
1895 을미사변, 유길준 서유견문 지음 
1896 독립협회 설립, 아관파천 
1897 대한제국의 성립 
1898 만민공동회 성립 
1899 경인선 개통
1903 YMCA 발족 
1904 한.일 의정서 맺음, 경부선 준공 
1905 을사조약, 천도교 성립 
1906 통감부 설치 
1907 국채 보상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황제 퇴위, 군대해산, 신민회 설립 
1909 안중근 이토 사살, 나철 대종교 창시 
1910 국권 피탈 
1912 토지 조사사업 시작(~1918) 
1914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 
1919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대한 애국 부인회 조직
1920 김좌진 청산리대첩 
1922 어린이날 제정 
1926 6.10 만세운동 
1927 신간회 조직 
1929 광주학생 항일 운동
1932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4 진단학회 조직 
1938 일제, 한글교육 금지
1940 한국 광복군 결성 
1942 조선어 학회 사건 
1945 8.15광복 
1946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1948 5.10 총선거 실시 
    대한민국 정부수립 
    여수.순천 10.19 사건
1950 6.25 전쟁 
1952 평화선 선언 
1953 휴전협정 조인, 제1차 통화개혁 실시
1960 4.19혁명 
1961 5.16군사정변 
196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66) 
1963 박정희 정부수립 
1965 한.일 협정 조인 
1966 한.미 행정협정 조인 
1967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71)
1970 새마을운동 시작,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2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76) 
       7.4 남북 공동성명, 남북 적십자 회담, 
       10월 유신 
1973 6.23 평화 통일 선언 
1977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81) 
1979 10.26 사태
1980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3 KAL기 피격참사, 아웅산 사건, 
       이산 가족찾기 TV 생방송 
1986 제10회 아시안게임 서울개최 
1987 6.29선언, 대통령 직선제 실시 
1988 한글 맞춤법 고시,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 
1989 헝가리.폴랜드 등 동국권국가와 수교
1990 한,소 수교 
1991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지방자치제 부활 
1992 한.중 수교 
1993 대전 EXPO 개최, 
       소말리아 UN 활동 참여, 
       금융실명제 실시 
1995 김일성 사망
2004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 정부 출범
2008 실용정부 이명박 대통령 정부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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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에 건설된 동서 회랑 추정"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경복궁 광화문권역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대형 건물터가 발견됐다.

이 건물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조선 전기 동.서 회랑(지붕이 있는 긴 복도)으로 추정됨에 따라 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경복궁 광화문 및 기타권역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광화문과 흥례문(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문) 사이 일부 구간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이를 확인했다.

가로 11.2m 세로 50m의 이 건물터는 정면 12칸, 측면 3칸의 동서 대칭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초석과 기단 등 건물의 기초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는 상태로 확인됐다.

또한 정면 주칸(기둥 사이)거리가 4m로 동일하며 흥례문 동.서 회랑에서 경복궁 남편 궁장(궁궐을 둘러싼 성벽)과 맞닿는 형태로 길게 연결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건물터의 토층에서는 조선 전기에 사용된 분청사기나 대나무마디굽의 백자편이 출토된 점에 비춰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졌다가 임진왜란 전후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소 측은 설명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홍례문(흥례문의 옛 이름) 동.서랑을 의정부.육조와 명사(名司)가 분합(分合)하여 팔직방(八直方)과 대조(待朝)하는 처소로 정한다"는 건물터의 용도를 규명하는 내용이 기록된 점도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한다고 연구소 측은 덧붙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고종 때 만들어진 용성문과 협생문이 있던 자리에 동.서 회랑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있었다는 점은 경복궁이 좀 더 화려하고 방대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편 광화문 동쪽 궁장, 흥례문 동.서 회랑에서 경복궁 남편 궁장으로 이어지는 내부 담장(남북방향) 시설과 담장에 나 있는 용성문과 협생문의 상태도 양호한 것으로 확인됐다.

용성문은 내부 담장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고종대 이후 정면 2칸, 측면 2칸의 구조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변화했다고 연구소 측은 밝혔다.

또 내부 담장 동쪽에 있는 협생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구조이며, 이 문 앞으로 박석이 정연하게 깔려있는 사다리꼴 형태의 기단부(가로 14.5m, 세로 16m)도 확인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광화문 일대의 용성문, 협생문, 광화문 동편 궁장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선대 건물지가 확인돼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은 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c)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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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해군본부>

 

 

 

KDX3 한국형이지스함의 3개함 중 1번함인 '세종대왕함'에 이은 2번함인 '율곡이이함'.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함, 대공, 대잠 능력 보유.
-SPY-1D(V) 레이더 등으로 구성된 이지스 전투체계를 탑재해 1000여개의 표적을 동시에 탐지 추적, 그 중 20여개의 표적을 동시에 공격이 가능.
-함대공 SM-2 미사일과 국내 개발된 '해성' 함대함 미사일 등 120여기의 미사일,장거리 대잠어뢰, 경어뢰, 근접방어무기체계인 '골키퍼' 탑재.
-적의 전파를 탐지/추적해 무력화하는 전자전 장비인 '소나타'를 비롯한 SM-2 미사일 발사용 수직발사대 보유. 
-재원: 길이 166m, 폭 21m, 최대속력 30노트(55.5㎞), 헬기 2대 탑재, 승조원30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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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엘리베이터 상상도 출처:NASA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그녀는 순식간에 100㎞ 상공으로 솟아올랐다. 까만 하늘을 수놓은 별은 숨막히도록 아름다웠고, 지구에 숨은 태양은 지표를 따라 금빛 빛줄기를 흘렸다. 별다른 진동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몸은 마치 줄을 타고 올라가는 거미처럼 유연하게 비상하고 있었다.'
-아서 C 클라크와 스테판 벡스터의 '퍼스트본(Firstborn·2007년 발행)'에서 발췌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주를 간다는 이야기는 SF소설의 단골 소재였다. 1895년 러시아 과학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가 프랑스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고 크게 감동해 '우주 엘리베이터'를 고안한 이래 우주 엘리베이터는 과학이 아닌 소설로 넘어와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약 한 세기 만에 우주 엘리베이터가 과학의 품으로 회귀하고 있다. 각국 과학자들이 앞다퉈 우주 엘리베이터를 세우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핵심은 탄소 나노튜브=우주 엘리베이터가 망상이 아닌 과학으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탄소 나노튜브 덕이다. 1991년 일본 전기회사(NEC)의 이지마 스미오(飯島澄男) 박사는 탄소 덩어리를 분석하다 육각형 그물 모양 탄소 구조물을 발견한다.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1밖에 안 되는 이 미세 물질은 지구에서 가장 튼튼한 물질이다. 강철보다 80% 가벼우면서 힘은 100배나 세다.

우주 엘리베이터는 건물에 있는 엘리베이터처럼 승강기를 오르내리게 하는 튼튼한 줄(지지대)과 동력이 필요하다. 특히 줄은 결정적인 요소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이 우주 엘리베이터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도 3만∼10만 여㎞ 높이까지 버틸 수 있는 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탄소 나노튜브가 개발되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비로소 현실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일본 과학자 100여 명은 9월 일본우주엘리베이터협회(JSEA)를 만들어 지난 14∼16일 도쿄에서 콘퍼런스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아시아, 유럽, 미국 등 각지에서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참석했다. 일본은 내년 2월에도 '나노 테크 2009'를 개최할 예정이다.

미국과 유럽도 적극적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비영리재단 스페이스워드와 손잡고 내년 봄 우주 엘리베이터 대회를 열어 가장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에게 상금 400만 달러를 준다. 리프트포트 그룹은 뉴저지주에 우주 엘리베이터용 탄소 나노튜브 제작 공장을 짓고 있다.

다음달 4일에는 룩셈부르크에서, 내년 8월에는 미국에서 국제 학술대회가 예정돼 있다.
◆"로켓보다 싸고 안전"=전문가들은 빨라야 10년, 길면 50년 이후에야 우주 엘리베이터가 완성될 것으로 본다. 그나마 '탄소 나노튜브가 지금보다 4배 강해질 수 있다면'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과학자들은 왜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를 우주 엘리베이터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

우주 엘리베이터의 가장 큰 매력은 싸고 안전하다는 것이다. 로켓으로 우주정거장에 화물을 실어나를 경우 1㎏당 1만1000달러가 들지만 우주 엘리베이터로는 220달러밖에 안 든다고 한다. 1회 수송 한도도 로켓은 20t이지만 우주 엘리베이터는 1000t까지 가능하다. 로켓이 발사될 때처럼 무시무시한 진동도, 폭발 위험도 없다.

이 밖에 핵 폐기물 같은 위험 물질을 지구 밖으로 배출하거나 케이블카처럼 관광용으로 쓸 수도 있다.

눈앞에 닥친 가장 큰 과제는 재원 마련이다. 현재 기술로 탄소 나노튜브를 1g 만드는 비용은 25달러. 우주 엘리베이터를 만들려면 최소 4억5000만 달러어치의 탄소 나노튜브가 필요하다. 이 비용을 줄이려면 기술 개발과 대량 생산이 절실한 데 아직 이 분야에 투자를 하겠다고 나서는 기업이 없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제프 호프만 교수(항공우주학)는 미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주 엘리베이터는 '만약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쯤'의 문제"라며 "현실화하는 순간 인류의 우주개발 역사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일보&세계닷컴-윤지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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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연합뉴스>
ADD가 개념형성 연구에서 제시한 1단계 모듈통합형 병사체계(왼쪽)와
2단계 일체통합형 병사체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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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루]

[아직까지 원형이 잘 남아있는 1.3km의 토성 둘레] 

[달성공원 입구]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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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복원모형]

[만월대 복원모형]

[현재 남아있는 돌계단]

[궁성터 발굴]

[궁성터 발굴]

[출토유물]

[출토유물]

7-8월 남북한이 공동 발굴조사하는 개성 만월대는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자리한 고려시대 궁궐터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재위 2년째인 서기 919년 정월에 개성에다 도읍을 정하고 만월대 자리에 궁궐을 창건했다. 이후 만월대는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역대 고려왕이 상시 거주하면서 정무를 보던 정궁(正宮)이었다.

동서 445m, 남북 150m의 장방형 대지를 차지한 만월대에서 정전(正殿)은 회경전(會慶殿)이라 일컬었다. 조선 광해군 때 편찬된 조선 팔도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건덕전(乾德殿)을 정전이라고 했으나, 12세기초에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된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정전은 회경전이라 했다.

나아가 고려사 희종 2년 4월 조에 수록된 기사에서도 정전을 회경전이라고 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해당하는 회경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이며 전면에 4개 계단을 만들고 그 좌우에는 동행각(東行閣)과 서행각(西行閣)이라는 부속 건물을 배치했다.

회경전 북쪽에는 고려왕실 보물창고인 장화전(長和殿)과 비상시에 왕이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원덕전(元德殿)이란 건물이 있었다. 또 서북쪽에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 후궁들이 거처하던 침전인 만령전(萬齡殿)이 있었다.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에는 사신 등이 바치는 물품을 받는 장령전(長齡殿)이 있었고, 나중에 집현전(集賢殿)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연영전(延英殿)도 있었다. 회경전 서쪽 인접 지점에는 왕을 위한 침전이 자리잡았고, 동쪽에는 세자가 거처하던 좌춘궁(左春宮)이 있었다.

정궁에는 13개 성문과 15개 궁문이 있었다고 기록에 보인다. 성문 중 동문인 광화문(廣化門)이, 궁문으로는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昇平門)과 신봉문(神鳳門), 창합문(嗽闔門), 의봉문(儀鳳門)이 유명하다.

승평문은 정전인 회경전으로 연결되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신봉문이 있었고 그 동쪽에 세자궁으로 들어가는 춘덕문(春德門)이, 서쪽에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태초문(太初門)이 있었다.

신봉문 안에는 왕이 중국 천자의 조서를 받들던 창합문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회경전으로 통하는 전문(殿門. 혹은 회경문<會慶門>)이 있었다.

건덕전 앞에는 건덕전문과 흥례문(興禮門), 의봉문이 있었으며, 의봉문 바깥에는 격구 경기를 하던 운동장인 구정(毬庭)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 회경전 터를 기준으로 동벽까지는 135m, 서벽까지는 230m, 승평문까지는 250m 정도이다.

출처:http://blog.yonhapnews.co.kr/ts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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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에서 현저히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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