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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현대편'을 보면 도시의 삶이란 가장 전형적이면서 가장 극화된(dramatic) 현대적 삶이다. 이 삶에서 현저하게 눈에 띄는 특징은 '비인격화' 내지 '물화'로서, 최대한의 이윤 획득을 목표로 하여 인간이 만들어 낸 체제가 이제는 거것을 지탱하는 사람들에게서 독립하게 되며, 사람의 힘으로는 그 움직임을 멈출 수 없는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변한다. 그런데 이들 산업 자본주의적 기구의 움직임이 개인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만큼 사람들의 불안감은 상대적으로 점점 더 커진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는 만큼 경쟁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그로 인한 패배자의 파멸은 점점 더 불가피해진다. 그리하여 회의와 비관주의가 세상을 풍미하며 목 조르는 듯한 생활읜 불안감이 나타나게 된다.

하우저에 의하면,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불안감은 그와 동시에 권태감과 보조를 같이 하게 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의 불연속과 불안감의 느낌, 즉 일종의 흥분상태가 일시적으로 단절되는 시간이 오면 사람들은 이상스러운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미 사물화된 감각과 리듬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이들에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냥 남겨진 시간이란 처리되어야 할 또 하나의 짐일 뿐이다. 그리하여 '시간 때우기'의 필요가 생겨난다.

대중들은 긴장해소를 위한 기분전환 혹은 오락으로서의 여가문화를 원한다. 그들은 고도의 정신적 집중을 기울여야 하는 것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이미 익숙해진 가운데 예측이 가능하여 오락적인 재미를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식상함에 대비하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제시하는 전략도 사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대중문화의 상투성은 내용적으로는 다를 바 없으면서도 지엽적인 측면에서 차별성을 강조하는 '유사 혹은 사이비 개별화(pseudo-individualization)'를 낳게 된다.

[문화비평과 미학, 최연희 정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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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500년경 제작 / 출처: 위키백과]

'개인' 이라는 개념이 싹트고, 그 개념이 예술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르네상스 시대부터이다.

르네상스는 신중심적 재현방식이 지배하고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변화였다. 이후 예술 작품은 점차 성스러운 것을 외면하고 이 지상에서의 삶을 가장 개별적인 것들을 통해 재현하는 일에 집착하게 된다. 일상적인 사물과 사건들, 개인과 그들의 인간적 감정 등이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개인의 재현과 더불어 개인-주체, 즉 화가가 등장한다.

말하자면, 르네상스 시대에 역사상 처음으로 화가의 서명이 작품 속에 들어가거나, 작품 속에 화가 자신의 시선이나 심지어 그 모습이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뚜렷이 보여 주는 것이 화가 자신을 그린 자화상의 제작인데, 이는 결국 예술 작품이란 예술가 자신의 개인적 창조물이라는 근대적 개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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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미술이란, 미술가들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머리에 떠올린 후 그것을 물질적, 대상적 형태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학이나 기록물 그리고 계획 안으로 표현할 때 작품이 완성된다고 간주한 미술이다. 모더니즘 미술은 그 순수성을 위해 '주제'를 제거하려 했는데, 개념 미술에 이르면 이제 주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소멸된다는 점에서 개념 미술의 미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온 카와라, <오늘 연작 No.217. (TODAY Series No. 217.)>, 1966



또한 미술이 조형적 '형식' 보다는 작가의 '개념'으로 이루어진다면, 이제 예술가가 어떤 것이 예술이어야 하고 어떤 것이 아닌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예술가는 화랑이나 미술관, 그리고 대중매체를 주관하면서 전문적으로 대중의 취향을 만들어 내던 비평가들을 밀어내게 된다. 그리고 그 같은 미술은 미적 의미를 가진 존재이지, 더 이상 취향을 주관하는 자들의 고객들에게 상품가치를 만들어 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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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출처: 위키백과]



헨델이 유럽 각 나라의 음악양식을 절충, 혼합한 것과 달리 바흐는 유럽 각 나라의 음악양식과 음악의 유산을 자신의 음악언어, 독일식 음악언어로 재해석, 바로크 음악어법을 족창적으로 완성시킨 음악가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헨델이 국제적인 명성과 음악가로서의 성공에 집착한 것과 달리 바흐는 기독교 신앙과 가정, 소시민적인 가치를 중시한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알려진다.

바흐의 초기작품은 북스테후데의 건반음악과 알비노니, 비발디의 합주음과 유사하다. 이후 바이마르(Weimar), 쾨텐(Cohtn), 라이프치히(Ldipzig)의 세 시기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음악어법을 개발하게 된다. 바흐는 성악과 기악에서 모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키퍼 칸타타(1732)>, <농민 칸타타(1742)> 같은 세속 칸타타에서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 일상적인 에피소드, 생활 ㅅ고에서의 경험, 느낌 등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극음악에 대한 감각을 보여준다. <커피 칸타타>는 해설지, 아버지(Schlendrian), 딸(Lieschen)이 등장하는데 커피가 몸에 해롭다고 못 마시게 하는 아버지와 커피 없이 살 수 없다고 재치 있게 항변하는 딸의 대화가 음악과 조화를 이루는 작품으로 내용을 알고 들으면 독일어 가사를 못 알아들어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곡이다.

<마태수난곡(1792)>은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성당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후 3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다. 신약의 <마태복음> 중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수난을 다룬 작품으로 78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 연주시간만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이 작품에서 바흐는 합창단을 베네치아 악파처럼 두 개로 분리시켜 모노와 스테레오 음향의 대조를 이용한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였다. 그리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다는 것과 같은 가사를 플루투가 스타카토로 연주하여 눈물의 느낌을 묘사하는 '가사 그리기' 기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극의 전개에 맞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등장, 2개의 합창대가 만들어내는 다성음악과 화성적 구조 사이의 긴장감과 조화가 수난곡의 내용을 잘 살리고 있으며 바로크와 르네상스 말기 다성음악양식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합리론자로 알려진 바흐는 특정감정표상법을 잘 이해하고 예술적으로 잘 적용한 작곡가일 것이다. 또한 평균율에 대한 바흐의 주장은 합리론자로서의 바흐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더 확인시켜준다. 바흐는 당시 조율체계였던 순정률의 불편함과 비합리성을 배격하고 대신 '한 옥타브를 12개의 균등한 음(반음)으로 분할'하는 평균율의 합리성과 편리함을 옹호했다. 평균율은 인위적으로 음의 간격을 나눈 것이기 대문에 아름답지 않다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관습에 의존하는 비이성적인 편견으로 본 바흐는 평균율 조율법의 아름다움과 편리함을 증명하기 위해 12개의 장조, 12개의 단조로 이루어진 <평균율> 곡집을 작곡하였다.

단일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모방, 변주하는 푸가 형식의 악곡들, 그리고 대위법과 화성구조를 통합한 <무반주 첼로 조곡>, <프랑스 조곡>, <영국 조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같은 기악곡들은 바흐의 합리론적 사고와 음악적 내응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들이다. 피아노 초보자들이 주로 연주하는 <인벤션> 같은 건반악기용 소품은 바흐가 자녀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스튜디오 녹음만을 고집했던 기인 피아니스트 굴드(Glen Gould, 1932~1982)의 독특한 해석 덕분에 유명해진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단순히 음형변주의 차원을 넘어서 리듬변주를 시도한 곡으로 변주의 교과서로 불리는 작품이다. 사색적이고 추상적인 음향을 추구했던 말년의 작품들은 바로크 말기에 시대를 역행하는 것으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독창적이며 개성 있는 주제, 상반된 목표를 갖는 화성과 대위적 어법의 조화는 바로크 어법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흐의 작품을 분류할 때 사용하는 작품번호 BWV는 '바흐 작품 목록' 이라는 뜻의 독일어 'Bach Werke Verzeichnis'의 약자로 독일 음악학자 슈미더(Wolfgang Schmieder, 1901~1990)가 1950년에 정리한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권도희 김성혜 이지선 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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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출처: 위키백과]



바흐가 생존 당시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과 교회에서 잘 알려진 존경받는 음악가였던 것과는 달리 헨델은 바로크 말기 유럽의 '스타' 작곡가였다. 독일에서 태어난 헨델은 오페라 작곡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와 나폴리로 유학을 떠난다. 이탈리아 유학시절 오페라 작곡가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를 독일에 보급하는 데 실패한 헨델은 금전적인 대우가 좋은 영국에 정착, 생을 마감한다. 1726년 영국에 귀화한 헨델은 사망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만큼 영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영국' 작곡가이다.

헨델은 42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작곡할 만큼 오페라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강했지만 거의 모든 오페라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오늘날 공연되는 헨델의 오페라 작품으로는 영화 <파리넬리>의 삽입곡으로 잘 알려진 '나를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들어있는 <리날도(Rinaldo, 1711/31>, <줄리어스 시저(Julius Ceasar, 1724)>, <알치나(Alcina, 1735)> 등이 있다.

오페라로 성공하고 싶은 바람과 달리 화려하고 웅장하면서 화성과 대위적 기법이 조화를 이루는 오라토리오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헨델이 오라토리오 작곡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오페라 제작실패에 대한 자구책이었다고 한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같은 극음악이지만 쿠대가 필요 없고 독창보다 합창 위주이기 대문에 가수에게 지불할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에서 헨델은 극음악의 다른 종류인 오라토리오에 집중한다.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원래 이 장르의 성격과 달리 성경의 내용에 충실하기보다 작가의 상상에 의존한 인물의 인간적인 면, 성격묘사, 극적인 흐름에 집중하고 있어서 오페라 같은 느낌이 매우 강한 편이다. 29편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한 헨델은 <메시아> 외에 <삼손(Samson, 1743)>, <솔로몬(Solomon, 1748)>을 작곡한다. 그가 오라토리오에 사용한 합창어법은 이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과 베토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외에 관현악곡에서도 헨델의 재능이 돋보였는데 대표작으로 3개의 관현악 모음곡 <수앙음악(1717)>과 <왕궁의 불꽃놀이음악(1749)>이 있다. 특히 <수상음악>이란 이름은 조지 1세의 요구에 따라 템스 강의 유람선 위에서 연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야외공연에 적합한 악기를 선택하기 위해 고심했던 헨델은 플루트, 오보에, 바순, 호른, 트럼펫 같은 관악기와 현악기의 음색을 잘 활용하여 유람선 위에서도 소리가 잘 전달되록 하였다.

루터교도였던 헨델이 좋은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준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여 루터교회에서 바흐, 슈츠와 함께 7월 28일 성인으로 바로크의 세 음악가를 기리고 있다. 헨델에 대한 당대인들의 존경심의 정도는 "내가 유일하게 만나고 싶은 사람, 이 세상에서 나(바흐 자신을 가리키는 말)를 제외하고 내가 유일하게 되고 싶은 사람" 이라는 바흐의 말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음악의 합리성, 프랑스 관현악합주의 웅장함, 이탈리아 벨칸토 창법, 화성과 다성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영국식 합창전통의 장점을 절충시킨 헨델은 극적 긴장감과 성악적인 섬세한 표현과 서정성을 바탕으로 바로크음악의 이상을 실현해낸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권도희 검성혜 이지선 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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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극이 한 장면/출처: 위키백과]



극음악은 음악, 무용, 연극, 미술 등의 여러 예술이 결합한 종합예술이다. 이러한 극음악을 중국에서는 희곡이라고 하는데, 송·원대의 남희, 원명대의 잡극, 명·청대의 전기와 곤곡, 청대의 지방희와 경극 등이 모두 희곡이라 불린다. 현재 중국에서는 320여 종류의 극음악이 연행되고 있어 죽욱의 갖아 대표적인 음악예술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희곡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경극이다. 경극은 영화 <패왕별희, 1993>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왕의 남자(2005)>에서 "챙~챙~챙~" 울리는 타악기 소리에 맞추어 그림과 같은 두터운 화장과 중국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광대들이 궁중에서 한판 벌이던 것을 기억한다면, 경극의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패왕별희/출처: movist.com]



경극은 노래·대사·동작·무술·화장·의상·소품 등 다채로운 요소들이 모여 이루어진 종합예술로서 중국의 전통공연예술을 대표한다. 중국의 다양한 지방극 중의 하나로, 북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800여 년의 변화를 거친 많은 종류의 희곡 가운데 가장 늦게 출현한 장르인데도 불구하고, 고전극의 미학적 전통을 집대성함으로써 최고의 완성미를 보여주고 있다.

경극의 기워은 1790년으로 알려진다. 건륭황제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지방의 많은 연극단체가 북경으로 모였는데, 그 당시 지방극 중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이황(二黃)과 서피(西皮)를 비롯하여 안휘성과 호북성 등의 지방극이 북경에 소개되었다. 이를 계기로 여러 지방극이 서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경극은 이황과 서피의 결합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처음에는 피황희라고 불렸고, 여러 단계를 거쳐 오늘날과 같은 최고의 예술형식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경극이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해온 것은 아니다. 1949년 공산정권 수립 직후와 1970년대의 문화혁명 기간에는 부르주아의 예술로 탄압을 받아 경극배우들이 설자리를 잃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영화 <패왕별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살루(장풍의 분)와 데이(장국영 분)는 패왕 항우와 우희의 역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지만, 공산정권 수립으로 비난과 힐난을 받고, 그간의 화려했던 경극배우 생활을 청산하게 된다. 1966년 문화혁명으로 인하여 경극배우였던 이 둘은 심문을 받고 공개자아비판까지 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약 10년간의 문화혁명으로 인하여 경극을 포함한 중국의 전통음악은 억압된 세월을 보냈지만 전통을 지키려는 예술인들의 노력과 중국인들의 끊임없는 관심으로 이를 극복하였고, 경극은 명실 공히 중국을 대표하는 공연예술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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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우스, envenuto Cellini 작품/출처:위키백과]



1. 탄생

페르세우스의 어머니는 아르고스의 왕녀로 이름은 다나에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는 자기 딸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자신이 죽으리라는 신탁을 받고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딸을 가두었는데, 보통은 청동으로 만든 탑에 감금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비의 신인 제우스가 황금이 비가 되어 그녀에게 내려오는 바람에 결국 아이가 생기고 말았다. 아들이 태어나자 겁이 난 아크리시오스는 두 모자를 상자에 담아 바다로 띄워 보낸다. 하지만 그 상자는 세리포스 섬에 가서 닿았고, 아이는 거기서 성장한다.



2. 메두사 목을 베다

한데 세리포스 섬의 왕인 폴뤼덱테스가 다나에를 좋아해서 그녀를 차지하려한다. 그리고 이때 이미 장성해 있어서 방해가 되는 페르세우스를 제거하려 음모를 꾸민다. 그래서 그에게 부과된 것이, 보는 사람을 모두 돌로 만들어버린다는 고르곤의 머리를 가져오라는 것이다(어떤 판본에 따르면 고르곤의 머리를 가져오겠다는 것은 페르세우스 자신의 제안이라고 한다).

페르세우스는 혼자 힘으로 이 일을 이룬 것이 아니다. 우선 요정들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장비를 마련한다. 고르곤의 머리를 담을 수 있는 자루, 날개신 그리고 보이지 않게 해주는 모자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얻는 과정도 그리 순탄치는 않은데, 우선 이 요정들에게로 가는 길을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노파인 그라이아이(회색의 여인들)에게로 갔다. 고르곤의 세 자매인 이 노파들은 이와 눈이 하나뿐이어서 그것을 돌려가면서 사용했는데, 페르세우스가 중간에 그것을 가로채고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것을 호수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해서 길을 알아낸다. 그 후 페르세우스가 어떻게 했는지는 두 가지 판본이 있다. 착한 판본에 다르면 그것을 노파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하고, 다른 판본에 따르면 보복이 두려워서 그것을 호수에 던져버렸다 한다(옛 동화들에 우리가 보기에는 끔찍하고 너무 심하다 싶은 보복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좀 더 못되게 행동하는 쪽이 원본이었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고르곤 세 자매가 있는 곳으로 갈 때 헤르메스와 아테네의 안내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은 좀 일관성이 없다. 신들이 직접 인도할 것이라면 조금 전에 그라이아이 자매를 속일 필요도 없었겠기 때문이다. 어쨋든 목적지에 당도하니 마침 고르곤 세 자매는 잠을 자고 있었다. 이들 중 죽는 존재는 메두사 하나뿐이었으므로, 페르세우스는 고개를 뒤로 돌리고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다(어떤 도기 그림에는 방패 없이 그냥 아테네 여신이 페르세우스의 손을 인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페르세우스가 사용하는 무기는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거세할 때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낫이다. 그래서 조금 현대적인 조각에서도 페르세우스가 들고 있는 칼에 며느리발톱처럼 작은 날이 칼등 쪽으로 튀어나온 것으로 새기기도 한다.

이와 같이 메두사의 목을 베고 난 뒤 페르세우스는 그 머리를 자루에 담고는 보이지 않게 해주는 모자를 쓰고서 달아난다. 곧이어 잠에서 깨어난 고르곤들이 추격해오지만 보이지 않는 그를 잡지는 못한다.

한편 목이 베였을 때 메두사는 포세이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이 베이자 그곳에서 포세이돈의 자식들이 튀어나왔는데, 하나는 날개달린 말 페가소스이고, 다른 하나는 크뤼사오르(황금의 칼)라는 이름의 작은 아이이다. 이 둘은 인간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말의 성질을 가졌던 포세이돈의 툭징이 둘로 나뉘어 형상화된 것으로 보인다. 크뤼사오르에 대해서는 그가 후에 게뤼온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야기는 없지만, 페가소스는 다음에 다룰 벨레로폰 이야기에 다시 등장한다.



3. 안드로메다 구원

페르세우스는 하늘을 날아 돌아가다가 아이티오피아의 바닷가에 이르러 아름다운 소녀가 바다괴물의 먹이로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소녀는 그 나라 왕비 캇시에페이아(또는 카시오페이아)의 딸로서, 어머니의 죄 때문에 희생으로 바쳐지게 되었다. 자신의 미모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졌던 캇시에페이아가 자기가 바다신의 딸들보다 낫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런 오만함은 당연히 바다신의 노여움을 샀고, 그래서 바다에서 괴물이 나타나 나라를 황폐하게 했고, 그 괴물을 달래기 위해 소녀가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와 결혼을 약속받고는 그 괴물을 물리친다(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헤라클레스가 트로이아 왕녀 헤시오네를 구원하는 것이 있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출처:위키백과]


 하지만 그들의 결합을 방해하려는 자가 있었으니, 안드로메다의 외삼촌으로 이미 그녀와 약혼이 되어 있던 피네우스라는 사람이었다(이 피네우스는 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이름이 같은, 훨씬 더 유명한 사람이 아르고 호의 모험에 나온다). 페르세우스는 그의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고르곤의 머리를 처음 사용한다. 그것을 꺼내서 적들을 모두 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세리포스로 돌아가서도 같은 전략을 사용하는데, 폴뤼덱테스 일당을 역시 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4. 그 후의 이야기

페르세우스는 요정들에게 빌린 물건을 모두 돌려주고,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네 여신에게 준다. 여신은 그것을 자기의 방패 가운데에 또는 그녀의 아이기스에 달았다고 한다(이런 설명은 왜 현재는 이런 이상한 물건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사람이 한번 보기만 해도 뱀으로 변하게 된다는 메두사는, 머리카락이 뱀으로 되어 있고 멧돼지처럼 돌출한 이가 있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작품들을 보면 요즘 기준으로는 별로 무섭지 않게, 그냥 넙데데한 얼굴에 혀를 내밀고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는 것으로 그려져을 뿐이다. 고르곤 상은 상고시대에는 그 무서운 모습 때문에 나쁜 것을 퇴치하는 효과를 바라고 건물장식 등에 많이 사용했지만, 고전기에는 점차 예쁜 여자 모습으로 그려지고, 그럼으로써 벽사의 의미가 퇴색되고 나니 이우헤는 점차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페르세우스는 그 후 아내와 어머니를 데리고 본향인 아르고스로 돌아갔는데, 외조부인 아크리시오스는 손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 도망쳤다고 한다.

그런데 페르세우스가 어떤 장례식 경기에 갔다가 원반을 던진 것이 아크리시오스에게 맞아 그를 죽게 했으며, 그렇게 해서 결국 신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후 페르세우스는 자신의 손에 죽은 외조부의 나라를 물려받기가 부담스러워서 이웃나라인 티륀스와 나라를 바꿔 다스렸다고 한다(이때의 티륀스 왕 메가펜테스는 프로이토스의 아들로서, 페르세우스의 오천 아저씨뻘이었다). 페르세우스에게서는 많은 자손들이 태어났는데, 지금 단계에서 기억할 만한 사람은 페르시아의시조가 되었다는 페르세스 하나뿐이다.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 카시에페이아 그리고 그녀의 남편 케페우스는 지금 모두 북극성 가까이에 있는 별자리의 이름이 되어 있다. 이들 별자리 얘기가 에우리피데스 비극에 나왔다니 헬레니즘시대 이전부터 전해지는 별자리의 유래로는 드문 사례이다.

[출처:신화의 세계/박종성 강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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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성과 통시성은 소쉬르가 그의 언어학을 발전시키면서 구분한 것으로 이후 구조주의의 많은 작업에서 근본적인 구분이 되었다. 현상에 대한 공시적 접근방식을 취하는 것은 역사의 한순간에서 이 현상에 접근하는 것이거나, 또는 이 현상을 역사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시성은 현상의 역사적, 시간적 측면관 관련되어 있다. 언어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에 관심을 두던 19세기 언어학의 접근방식과는 반대로,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은 언어를 변하지 않는 구조로서 조사한다.

[출처: 앤드루 애드거, 피터 세즈윅 편(박명진 외역), '문화 이론 사전', 한나래, 2003, 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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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여신/출처: 위키백과]



아테네 여신은 여신이면서도 남성적 특성을 많이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어머니 없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존재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직조(織造)의 신이면서도 전쟁의 신이다.

직물을 짜는 재능은 확대되어 모든 기술을 통제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헤파이스토스와 함께 여러 공방에서 숭배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아르고 호 영웅들이 모험하기 위해 떠날 때 배만들기를 지도하는 모습이나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인간을 만들 때 그것을 지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아테네는 트로이아 목마작전에도 관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녀가 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특성은 포세이돈의 경우처럼 이 여신의 기원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아테네가 기술의 신으로서 재갈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벨레로폰이 날개 달린 말 페가소스를 차지할 때 아테네 여신의 도움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여신이ㅡ 도상적 특징은 항상 무장을 갖춘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 모습으로 전장을 누비는 모습이 '일리아스'에 잘 나와 있으며, 젊은 영웅들을 뒤에서 보호나는 역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헤라클레스를 보호하는 모습으로, 유명한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메토프에는 이 영웅의 열두 가지 위업 그림마다 아테네 여신이 빠지지 않고 새겨져 있다.


[아테네 여신/출처: 위키백과]



종교적 숭배를 위한 상(像) 중에는 이따금 무장을 걸치지 않은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도 그것이 아테네임을 알 수 있는 표지가 있다. 그녀의 무장 중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아이기스라는 것이 어깨에 둘러져 있는 것이다(최신식 전함 '이지스'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뱀으로 테두리가 장식된 숄 같은 것인데, 여신은 때로 방패 없이 그것을 방어무기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휘둘러 상대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원래 제우스의 것인데 아테네가 일시적으로 빌려 사용하는 것처럼 되어 있기도 하다.


[파르테논 신전/출처: 위키백과]



아테네 여신은 처녀신인 만큼 연애담이 없지만, 일종의 양자를 얻게 된 이야기는 하나 있다. 즉, 헤파이스토스가 그녀를 마음에 두고 성급하게 행동하다가 씨앗을 땅에 흘려 거기서 에릭토니오스라는 아기가 태어났다는 얘기이다. 이 아이는 땅에서 태어난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체로 뱀이거나 아니면 하체가 뱀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를 맡아 기르던 여인들을 놀라게 하고는 결국 아테나이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네 신전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흔히 거기 모셔졌던 아테네 상의 방패가 뱀 형상으로 받쳐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아테나이의 아테네 신전에서는 신성한 뱀을 사육했으며, 페르시아전쟁 때는 이 뱀들이 다 사라져서 시민들이 도시를 비우고 퇴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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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출처: 위키백과]


헤르메스라는 이름은 '돌무더기'를 뜻하는 '헤르마'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이것은 민간어원설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이 신의 기능과 잘 맞는다.

우리네 풍습에서 서낭당의 돌무더기가 그러하듯 희랍에서도 돌무더기는 주로 마을이나 지역을 가르는 경계에 쌓여 있었는데, 헤르메스는 경계를 지키는 사람들과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신이었던 것이다. 경계를 지키는 사람들은 양치기들이고,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나그네, 전령, 도둑, 거지, 상인이다. 헤르메서는 이런 사람들의 보호자이다.


[헤르메스/출처: 위키백과]


헤르메스는 자신이 보호하는 활동을 직접 실행하기도 하는데, 그가 태어나자마자 아폴론의 소떼를 훔쳤다는 이야기는 도둑의 ㅅ니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헤르메스는 보통 올림포스 신들의 전령 역할을 하고 있어서 그의 도상적 특징은 전령의 지팡이와 날개신, 나그네 모자(또는 날개 달린 모자) 등이다. 그는 신과 사람들 사이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 사이도 오가기 때문에 영혼인도자(psychopompos)라고 불린다.(그래서 로마에서는 검투사 시합에서 죽어 쓰러지는 사람이 생기면, 헤르메스 분장을 한 사람이 나와서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그 사람을 찔러보았다고 한다.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는 절차이다). 그래서 헤라클레스나 오르페우스의 저승방문을 묘사한 그림에는 자주 헤르메스가 등장한다.

헤르메스의 어머니는 아틀라스의 딸인 마이아이다. 헤르메스의 수식어는 그가 이오를 지키던 아르고스를 죽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지만, 이 신은 대체로 온화하고 장난기 있는 신으로 되어 있다. 태어나자마자 아폴론의 소를 훔쳐 감추고 시치미를 뗀 이야기나 그 일이 들통나자 얼른 거북을 잡아 뤼라를 만들고 그것을 소떼와 바꿨다는 얘기도 그런 재치 있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가 헤파이스토스의 그물에 잡혔을 대도 천륜이 땅에 떨어졌다는 식으로 개탄하기보다는, 자신이 그보다 더한 수치를 당하더라도 아프로디테 곁에 눕고 싶다고 부러움을 표명했다. 그 이야기 때문인지 아프로디테와 헤르메스 사이에도 아이가 하나 생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헤름아프로디토스라는 존재이다. 이름부터 남녀신의 이름이 합쳐진 이 아이는 어떤 요정의 사랑을 거부하다가 그녀의 소원 때문에 남녀합체가 되었다고 한다.

[신화의 세계/박종성 강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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