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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리스토텔레스/네이버 지식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플라톤의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어받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교적 상식에서 출발한다. 그리스 말기의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복잡하고 이론적인 것은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당장 고통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그저 관념적인 이야기를 해 봐야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그의 행복론을 우리의 상식에 맞추어 풀어보기로 하자. 행복감을 언제 느끼는가? 뭔가 목표로 한 일이 잘 성취되었을 때 느낀다. 시험을 잘 보려고 공부를 많이 했는데 생각대로 시험을 잘 보았다면 행복하다. 이와 같이 어떤 행위가 애초 목적한 대로 잘 성취되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모두 무언가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또 다른 어떤 것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것이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것은 바라는 대학에 입학을 하거나 원하는 직업을 잘 얻기 위함이다. 이렇듯 인간의 행위는 수단과 목적의 연쇄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 연쇄체계 안에서 잘 이어가는 것, 그것이 잘 이어지면 행복인 것이다. 그런데 그 수단과 목적의 연쇄체계를 계속 올라가다 보면 궁극 목적에 달할 것이고, 그 궁극 목적에 다다르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선이다. 그렇다면 각자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최고선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최고의 행복이다. 이렇게 보면 행복이라는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다. 중간 중간 목표로 한 것을 잘 이루는 것, 활동을 잘해서 잘 이루는 것이 선(agathos)이자 행복이다.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해서 다 선이며 행복인가? 이를테면 도둑질을 계획해서 잘 이루었다면 그 또한 행복인가? 그렇지 않다. 일시적인 행복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다른 한편에서 불안감과 죄책감이 늘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것은 행복의 단계 중 가장 최하급 단계, 즉 이성적 명령이 아닌 동물적 욕망에 기초한 성취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다. 감각적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공격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의 물질적,감정적 가치를 목표로 하는 한, 서로 경쟁을 해야 한다. 감각적 욕망에 매달린다는 것은 남도 나를 향해 그런 욕망을 가지고 맞서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늘 긴장을 해야 하고 그만큼 또 불안하다. 물론 종종 그렇게 싸워서 얻는 즐거움, 쾌감이 있지만 그 사정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쾌감은 언제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시적인 만족감일 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한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을 가르치지만 무한경쟁에서 늘 이기는 사람은 없다. 살아남는 것은 대개 디기업과 재벌들일 뿐 그 안에서 개인의 삶은 끝없이 소모될 뿐이다. 그러나 달리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인의 생활을 검투사와 같은 삶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칼 때문에 죽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칼을 놓을 수도 없는 삶, 실로 불행한 삶이다.

 그러면 지속적인 즐거움, 훼손되지 않는 즐거움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욕망에 눈이 멀어 부도덕적인 일을 감행하면 일시적인 행복은 얻을 수는 있어도 종국에는 고통에 빠지기 때문에 분별 있게 모두에게 선이 되는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공동체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면 그 또한 나의 정점을 보고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서로 좋은 것이다. 이타적인 희생과 봉사만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것을 나누라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그 만큼 다른 사람에게 먼저 베풀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누가 웃는 얼굴에 침을 뱉겠는가? 그렇게 공동체에서 남과 조화를 이루는 일, 그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이루는 것이다. 새치기하지 않고 줄을 잘 서면, 잠깐 다리가 아프지만 결국을 편하고, 자리를 양보하면 몸은 좀 불편하지만 마음이 훨씬 편하다.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그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렇게 당장의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고 이성적 반성을 통해 보다 깊게 생각하고 그 깨달음에 따라 처신하면 즐거움은 더욱 커지고 깊어진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명한 '행복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행복이란 인간이 가지는 여러 기능 가운데서도 이성적 기능,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적 기능을 잘 발휘하고 발달시켜서 얻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요체이다.[행복에 이르는 지혜,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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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늘 일정한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를 알고, 무엇인가를 느끼고, 무엇인가를 의욕하며 산다. 인간은 '상황 내(內) 존재(Being in Situation)'인 것이다. 그러면 상황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알기 쉽게 말해 자연적,사회적,역사적 환경이라고 할 것이다. 지리적 위치, 지형, 기후 등은 자연적 환경이며, 가정, 학교, 지역사회, 회사, 단체, 국가, 국제사회 등은 사회적 환경이다. 그리고 자연, 사회 ,역사 이 세 개의 환경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학문이나 예술도 인간관계 내지 도덕도 종교도 정치도 경제도 모두 문화이고, 이 문화를 전달 확충하고 문화의 주체인 사람 각각의 발달을 도모하는 것 또한 교육이라고 불리는 문화활동이며, 그 문화의 변천 발전의 과정이 역사라 불리는 문화현상이다. 그러므로 '상황 내 존재'인 인간 각자의 행복은 인간과 상황 내지 문화와의 유기적인 긴장관계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개인이 상황으로부터 떨어져 있거나 또 상황이 개인과 떨어져서 우리들 밖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행복을 논할 때는 개인적 측면과 함께 사회적 측면이라고 하는 인간 존재의 이중적인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즉 행복의 내적 조건과 행복의 외적 조건이라는 두 개의 조건을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전자는 개인의 주관적 마음의 문제이며, 후자는 객관적 상황의 문제이다. 그러나 행복론은 비록 이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할지라도, 그 밑바탕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이므로, 종국적으로는 주객 양자의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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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행복한 토끼/온라인 커뮤니티]

 

 플라톤의 행복론은 그리스 고유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으로 온갖 다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몫을 누리면서 다른 것들과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모습이고 사람이 또 본래 살아야 할 모습이며 나라가 추구해야 할 가장 올바른 상태이다. 이러한 모습을 플라톤은 정의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정의롭다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는다. 정의롭고 올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은 받으시 행복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그리스 공동체란 발칸반도 곳곳에 산재한 각각의 도시국가들이 제 나름의 특징과 역할을 가지고 다른 이웃 도시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고, 행복한 나라라 함은 한 도시국가에 속하는 여러 다른 계층, 즉 통치자 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들이 서로 상대방의 역할을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핞고, 그들 각자의 본성과 소질에 맞게 자기 역할을 최고의 상태로 수행하면서 서로 조화와 공존을 이루면서 그 나라 전체의 평화와 평온을 이룩하며 사는 것이다.

 요컨데 사람이 사회적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여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하고 자기가 누려야 할 것을 잘 누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것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서로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공존해 가는 것이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인간 각각의 내면의 행복한 상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개인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세 가지 측면, 즉 냉철한 이성의 측면과 자존심과 명예를 중시하는 기개의 측면, 그리고 감각적인 욕심과 충동에 따라 살려는 욕망의 측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플라톤은 이런 세 가지 서로 다른 부분이 인간 영혼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들 가운데 어떤 한 부분이 나머지 부분을 억누르거나 지배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플라톤이 이성주의자라고 해서 개인 내면의 이성이 나머지 기개나 충동을 억눌러서 금욕적으로 사는 것을 플라통이 말하는 행복한 삶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나게 노는 자리에 가면 욕망의 측면이 조화를 이끌어 가면서 잘 놀아야 하고 자존심 내세우거나 용기를 발휘해야 할 곳에서는 기개의 측면이 그렇게 해야 한다. 이처럼 개인적으로행복하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훼손됨이 없이 각각의 부분이 마치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루면서 때로는 빠른곡, 때로는 평정한 곡을 연주하듯 내적인 조화를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제멋대로 본능을 충족시키거나 금욕주의자처럼 일체의 본능을 따르지 않거나 하는 것은 모두 행복한 삶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행복론은 인간의 다층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하고 있는 매우 균형잡힌 행복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 플라톤/네이버 지식백과]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론의 요체는 '수분자족(守分自足) 하며 살아야 한다.' 즉, '분수를 지키고 스스로 넉넉함을 느낀다'라는 동양적인 금언과도 일맥상통한다. 자기 분수와 직분, 자기 할 일을 잘 알고 그것에 충실하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물론 수분자족하며 살자는 말은 자기는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수를 알고 그 정도로나마 만족해야지 하는 패배주의적인 자기 위안 내지 자기 합리화로 들리기도 한다. 하기는 강자나 지배자는 수분자족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말은 강자가 약자를 업신여기면서 하는 말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론, 이른바 수분자족론은 약자에게만 강요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별들이 각각 제자리에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코스모스를 이루듯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에게 요구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통치 계층은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욕망과 흥미를 가지고 있으니 적성과 소질대로 나라를 잘 다스리면 당연히 행복할 것이고, 군인 계층은 소질대로 용기와 명예를 가지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니 통치자의 역할을 넘보거나 생산자의 물건들에 눈을 돌리지 않고 나라를 잘 수호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생산자 계층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신발을 만들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잘하면 당연히 그 때문에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한 사회는 서로의 적성과 소질을 실현해 가면서 서로 의지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적성과 소질은 각각 다른 뿐 어느 것이 보다 좋은 것인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사람 사는 사회를 채우고 귀하고 소중한 가치이고, 각자는 누구의 간섭이나 침해 없이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의 적성에 따른 고유한 역할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 가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기본적으로 행복한 나라, 행복한 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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