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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해나갈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함, 그리고 그것이 주는 불안감입니다.

큰 마음을 먹고 계획하고, 화이팅을 외치지만,

어느 순간 불현듯 밀려오는 불확실함은 막연한 불안감을 주고,

자신에 찼던 굳은 맹세를 너무나 쉽게 약화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는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지만,

목표한 바 100%를 다 이뤄내지는 못하더라도 또 조금 느리더라도,

결국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바로 끈질기게 해내느냐, 그렇지 않고 포기하느냐일 것입니다.

 

힘들어 지쳐 좌절하려 할 때, 또 자신감이 떨어지려 할 때는 

힘을 주는 명언 한 마디를 보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길이 가깝다고 해도

가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며,

일이 작다고 해도

행하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는다.

-순자(荀子)-

 

다 알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굳게 믿고 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조정민, 『고난이 선물이다』,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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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우리가 불행한 이유를 다른 데서 찾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집착하고 스스로의 단점에 집중하기 때문에 행복과 멀어졌다고 보는 게 러셀의 믿음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고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며 동참하는 게 바로 행복 부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별것 아니지만 나는 나 자신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들 수 있다.
나한테는 그런 능력이 있다.
-그르초 막스(Groucho Marx)-

러셀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비상한 영민함을 보인 자작(子爵, 백작보다 아래 남작보다 위인 영국 귀족)이었다. 하지만 겨우 다섯 살 때 이미 침울하고 기운 없는 아이였다고 고백한다.

 

"난 태어날 때부터 행복하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사는 게 싫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자살을 꿈꾸었고 실행에 옮길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수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열망 덕분에 자살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자살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수학에 관한 학구열로 스스로를 다잡은 10대 소년, 목숨을 연명할 이유를 이런 데서 찾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을 정도다. 어쨌든 러셀은 수학 덕분에 절망과 무기력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점점 줄어드는 자기 몰두'라는 화두를 던진다. 러셀은 학구열을 불태웠다. 연구에 몰두한 덕에 그는 20세기 최고의 석학 중 한 명이 되었고 수많은 성과를 일궜으며 차츰 우울증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다.

 

러셀이 자살 충동을 사그라뜨릴 수 있었던 요인이 수학이었다는 말을 듣노라면, 그 요인이 다른 사람들에겐 되레 자살 충동을 부추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우리가 러셀의 이야기에서 배우게 되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주는 도전과 분투에 몰두한다면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이다. 러셀의 믿음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집착할 운명일 수밖에 없는 각자의 '어리석음과 단점'이 있는데, 우리가 나름의 충족감을 느낄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청교도적인 엄격한 태도로 자신의 단점에 집중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자기를 돌아보는 강박증이 있다.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는데 그중 첫째는 우리가 우울감에 흠뻑 젖은 술판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북유럽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러셀은 우리가 잔뜩 짜증이 날 때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해버리고픈 유혹을 느낀다는 걸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애를 쓰는 대신 몇 시간 동안 불행 자체를 망각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하는 건 일시적 자살이지"라고 러셀은 한마디 툭 던진다.

 

오늘날 예를 들어보자, 2006년에 잡지 '톱 산티(Top Sante)'가 40대 이상의 여성 2천 명을 대상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자기 몸에 몇 점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평균적으로 10점 만점에 3.5점을 준다는 결과가 나왔다. 대략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의 여성들이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변비약을 복용한다고 인정했다. 응답자들은 평균적으로 10킬로그램 이상을 줄이고 싶어 했고 그들이 선망하는 체형의여성을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루기 힘든 체형에 대한 강박증이 어느 정도는 있다. 그런 몸을 갖게 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수많은 잡지와 매체로 인해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자극을 받는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썩 만족감을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스스로를 가장 좋아하는 관심 대상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모두 러셀처럼 수학에 관한 천부적 재능을 이용해 끔찍한 자기 강박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마냥 더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며 넋 놓고 앉아 있는 대신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수는 있다. 이런 추동(推動) 우리가 러셀에게 빚진 부분이다.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생각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에게 러셀이 전하는 조언은 이것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무엇이든 하라.

어린 러셀이 그랬듯 우리 역시 선택을 해야 한다. 행복해질 텐가, 불행해질 텐가? 서슴없이 행복 쪽을 택한 이들에게 러셀이 다시 묻는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노력이 해가 될 것 같은가? 이에 대한 대답이 'No'라면 왜 멀거니 앉아만 있는가. 지금 당장 벌떡 일어나 노력에 불을 지펴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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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인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 이는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운이다.

 

 

청년기는 12월31일 밤에 늦게까지 있는 걸 허락받는 시기이고 중년기는 그날 밤 의무적으로 늦게까지 있어야만 하는 시기이다.-빌 본(Bill Vaughn)

 

 

러셀의 책 '행복의 정복' 전반부는 우리가 왜 불행한지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러셀의 관점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얘기는 천천히 들어보기로 하자. 일단 러셀은 "만약 당신이 지금 행복하다면 당신 친구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행복할까 자문해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행은 언제 어디서든 당신과 마주친다"고 덧붙인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행복해지겠노라 마음먹는 통에 그 누구도 마음껏 즐길 수 없는 사교 모임에 참석해본 적 있는가? 그것만큼 짜증나는 경험도 없다. 새해 첫날이야말로 가장 좋은 예다. 하지만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얼마든지 더 있다. 가족 생일(특히 자기 생일), 총각 파티나 처녀 파티, 친척집 방문, 친구 애들까지 가세한 모임, 호화스러운 휴가 등등.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느라, 혹은 불행을 밀어내느라 엄청난 노력과 돈을 쏟아 부으며 숨을 헉헉댄다. 러셀이 지적하듯 우리는 병적일 정도로 지나치게 촉각을 곤두세워 행복을 탐색하거나 불행을 거부하는 와중에, 정작 우리 자신이나 친구들에 관해서는 외면한다. 중요한 걸 놓친 상태에서 뭔가가 바뀔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우릴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을 일들을 미련하게 되풀이하며 산다.

 

우선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게 있다. 우리 대부분은 종종 행복하지 않은 순간과 맞닥뜨린다. 최소한 더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러질 못하고 산다. 이건 수치스러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러셀이 조사하지 못한 부분을 하나 짚고 가야 한다. 대체로 우리의 외부 환경은 행복감과는 크게 상관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퓨 리서치센터는 사람들이 지난 40여 년 동안 경기 불황과 호황, 의료 및 과학기술의 발전을 겪으며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지 꾸준히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수치는 희한하게도 항상 비슷하다. 미국 국민의 절반 정도는 꽤 행복하고 약 30퍼센트는 매우 행복하다고 답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불행을 열거하자며 책 한 권으로는 모자랄 하위 집단이 늘 있기 마련이다. 노숙자, 만성 질병을 앓는 환자,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 정신 질환자 등등. 이런 사람에게 불행은 상당 부분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런데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이 느끼기에 우리 주변 환경은 40년 전에 비해 놀랄 만큼 좋아졌다. 하지만 퓨 리서치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자가용, 해외여행, 인터넷, 위성 텔레비전, 리필 방향제도 행복 지수를 높이지는 못한다고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러셀의 희망사항을 실행해보자고 마음먹을 수 있다. 즉 바깥세상의 애매한 즐거움 속에서만 행복을 찾으려 아등바등하는 걸 그만두기로 해보자. 가끔은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에겐 변화의 힘이란 게 있다. 우리는 자기 주변을 관리하고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박차를 가해 더 많이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덜 할 줄 아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러셀은 새해 첫날 '행복해지기로 굳게 다짐하며' 외출했던 1930년대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 물질적인 것이 행복을 전해주지 못하는다는 걸 깨닫지 않는 한, 현대를 사는 우리의 하루하루도 행복감보다는 부담감과 비장함이 가득한 매해 12월31일과 같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인내심을 요구하면서 억지로 웃어줘야 하는 모임, 약속, 혹은 친구 관계가 있는가? 당신이 그걸 싫어하고 늘 싫어했고 앞으로도 계속 싫어할 거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라. 그 모임이나 관계에서 벗어나기가 그리 녹록하진 않겠지만,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기 전까지는 그만큼 불행의 시간이 하염없이 연장될 뿐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탈출을 시도하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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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특출하지 않다는 이유로 행복할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은 평범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게분명하다.
평범한 사람들을 이렇게나 많이 만드시지 않았는가.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던 수년 사이에 처음으로 널리 공표된 생각이 있다. 그건 바로 모든 이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으며 누구든 그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곧 지식인 계층 사이에 확산된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났고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이 생각의 핵심은 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고 자기 존재를 눈에 띄게 드러내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D. H. 로렌스가 노래한 육체노동자 주인공부터 T. S 엘리엇이 그린 중년의 프루프록이 보여주는 좌절까지, 보통 사람들이 드러내는 희로애락 또한 마땅히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제기된 것이다. 가난하고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역시 행복을 희구할 권리,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췄다는 사상이 보편적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행복 구추권이 있다는 소리가 우리에겐 그리 놀랍지 않다. 그런데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에게 주입되다시피 한 믿음이 있다. 즉 오직 위대한 사람들만이 불행을 담아낼 비극의 용량을 갖추고 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소량의 슬픔만 감내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러셀은 헨리 입센이 쓴 희곡 <유령>을 <리어왕>과 비교하면서 입센의 작품을 칭찬한다. <유령>에는 남편과 사별한 한 여인(알빙부인)이 등장한다. 남편의 불륜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종교적 도덕성에 순응하던 이 여인은 결국 희생불능으로 무너져버리고 그녀의 아들과 연인 역시 파멸한다. 이 희곡이 상연되는 걸 본 적 있다면 웃을 일이 별로 없는 공연임을 알 것이다. 매독 얘기가 나오는 희곡에 웃음 코드가 들어가긴 힘들다. 알빙 부인은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인데도 그녀의 성격상 결함이 결국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의 파멸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분명히 비극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평범한 여인의 이야기에 마음을 써야 할까?

 

관심을 갖지 않을 이유는 또 뭐냐고 러셀이 묻는다. "우리는 더 이상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기지 않는다. 비극적 열정을 발산할 권리가 이들에게만 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악착스레 일하고 고되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러셀은 이렇게 말하면서, 고귀한 비극은 공동 소유라고 밝힌다. 비극은 한 개인에게 우연히 닥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습에서 기인하는 무엇이라고 본 것이다.

 

행복이 '감히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는 낡은 생각은 누가 봐도 이상하다. 하지만 행복과 자기 자신을 무관하게 여기는 이런 생각은 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통해 여전히 우리 무의식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수백만 달러를 잃었지만 그래도 수백만 달러가 아직 은행에 고이 남아 있는 사람은 평생 그런 액수의 돈을 만져볼 일도 없고 으리으리한 집에 살 일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에 비하면 암만 해도 자기 불행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명한 사람이 암에 걸리면 안됐다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웃 사람이 똑같은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더 슬피진 않다. 완벽한 세계라면 우리는 누구에 관한 소식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방점을 찍어 다룰 것이다. 하지만 그건 완벽한 세계가 아닐 것 같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요성이 동일한 뉴스만 나오는 텔레비전을 봐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생각만 해도 숨 막히고 지긋지긋한 노릇이다.

 

부자들, 유명인사들, 특권층 사람들도 안 좋은 일을 겪는다. 하지만 그들의 불행은 우리가 직접 겪는 나쁜 일보다 심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딱 일주일만 연예인 촌평(gossip)을 끊어보라. 가급적이면 30년이고 40년이고 꾸준히 그렇게 해보라. 창조적 자극을 위해 우리 가정을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도움과 지지가 필요한 사람들은 연예인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과 이웃, 친구와 직장 동료들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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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질투를 경험한다. 질투는 단순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미래의 행복 가능성까지 빼앗아가 버린다.

이 세상에 누구도 나 같은 사람은 없다.
내 생각에 10년에 한 번씩 시대의 아이콘 같은 금발 미녀가 등장한다.
마릴린 먼로나 다이애나비가 그랬고, 지금은 바로 내가 그 아이콘이다.
-패리스 힐튼(Paris Hilton)

"어린이들은 질투심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어른들보다 단지 약간 더 개방적이다." 그러면서 러셀이 말을 이어간다. "하녀 아야기를 들어보자..." 아니, 우린 하녀와 관련된 일화를 들을 생각이 없다. 모든 일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상황에서 러셀은 왜 하녀를 둬야만 할까? 그는 어째서 그렇게 특별한가? 이건 불공평하다. 우린 러셀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이렇게 불뚝 질투가 솟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질투 치료제는 오로지 행복뿐이다." 아니면 이런 표현은 어떤가. 남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불행한 이들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곤 한다. "어느 이집트 학자 앞에서 다른 이집트 학자를 칭찬해본 적 있는가?" 이건 러셀의 질문이지만 보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해보자. 언젠가 제3자에게 누군가를 칭찬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쓸데없는 얘기를 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나중에는 결국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우리의 잘못은, 얘기를 듣고 있던 상대방의 어린애 같은 감정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화제의 대상만큼 똑같이 칭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뾰로통하게 샘이나 내는 어린애로 만드는 건 확실히 질투만 한 게 없다. 누군가 상처받는 상황이 안 생기도록 다른 사람 칭찬을 점잖게 유보하면 어떻겠냐고? 이런 흔한 대안은 틀림없이 잘못된 생각이다. 이는 모든 것을 평범하고 흔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접근법이다. 그저 내면의 아이를 만족시키는 수준 낮은 접근법.

러셀은 문제의 반대편 끝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러셀이 언급한 이집트 학자 중 한 명이거나 그런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라면, 동료들의 흠을 찾는 게 아니라 칭찬할 이유를 찾는게 우리의 주요 임무다. 이렇게 대처함으로써 우리는 비교의 유의한 요소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는 부정적 방식을 대신할 대안을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쉽지 않다. 대중매체가 비교라는 문제를 다루고 이를 정의하는 방식 때문이다. 누가 섹시하고 누가 못 생겼느냐, 누가 뚱뚱하고 누가 말랐느냐, 누가 베스트 드레서고 누가 워스트 드레서냐..., 이렇게 이분화한 강조는 늘 부정적이기 마련이다. 지금 언급할 영화를 보라고 권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예시 차원에서 얘기는 하겠다. 화려한 패션과 질투 문화의 고위급 여사제 같은 패리스 힐튼이 등장한<미녀와 폭탄(The Hotie and the Nottie)이라는 제목의 영화다. 내가 확인했을 당시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 Internet Movie Database) 최악의 영화 52위에 랭크되었다. 줄거리는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못 생긴 소녀가 있다. 소녀한테는 남자 친구가 없다. 그래서 대대적인 메이크오버가 감행된다. 소녀는 아름다워진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질투 취급 설명서로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예는 없을 정도다. 겉모습이 아름답거나 겉과 속이 모두 쓸모없거나.

마음속으로 이 세상을 예쁜이와 못난이로 이분화하는 파괴적 결과를 피하려면, 러셀의 조언대로 남을 흠 잡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뭐든 유쾌한 일이 생기면 전력을 다해 그 기쁨을 만끽해야 한다." 러셀의 전언이다. "이게 다른 것만큼 그렇게 즐겁지 않은 것 같은데, 따위의 생각은 접어두라."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가 닥치면 우리는 그들의 감정에 공감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성공을 거둘 때 '그들의 기쁨을 공감하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하다. 그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라. 질투는 우리의 발목을 잡지만 긍정적 공감은 우리를 분발시킨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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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치르는 비용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자녀들이나 배우자를 기쁘게 하려는 노력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아이들을 통해 알게 되는 건 아누 많다.
가령 나의 인내심은 얼마만큼인가 하는 이런 것.
-프랭클린 P. 존스(Franklin P. Jones)

 

"삶을 향한 일반적 자신감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올바른 사랑을 받는데 익숙해질 때 우리는 인생을 향해 자신감을 보일 수 있다." 러셀이 말하는 핵심은, 이런 사랑이 아이였을 때 부모와 아이 사이의 특별한 유대감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무슨 이유에서든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는 소심하고 모험심이 없으며 두려움과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 같다. 이런 아이는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즐거운 탐험을 떠난다는 기분으로 나설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탐험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뒤죽박죽 북새통'을 이루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줄 것이므로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정받고 편안해지는 데만 허겁지겁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역경이 마치 감당 못할 재난처럼 다가온다. 실패와 좌절을 다 감수하기로 한 사람에게도 실패와 좌절이 비참하긴 마찬가지다.

 

얼마만큼의 사랑이 지나친 것일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때 그들에게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아이들이 잘 자라는 데 도움을 주려고 애쓸 뿐이다. 물론 자녀들을 양육할 때 "안 돼" 같은 말을 쓰게 된다. 아이들이 합리적인 거절과 비참한 감정적 거절을 연계시키기 시작한다면, 부모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을 때 아이들은 거부당하는 기분을 막아내려고 가능한 한 무슨 것이든 하려고 든다. 그 어떤 갈등 상황도 다 피해버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설령 부모를 조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세상 전체를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거절당하는 상황을 피할 수도 없지만 자꾸 피하기만 하다 보면 어느덧 거절 자체가 파괴력을 더해갈 게 뻔하다.

 

자, 과잉보호 어머니들을 향한 러셀주의자의 엄명을 들어보자.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를 재난에 대해 아이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경고하는 어머니가 있다. 개란 개는 모조리 사람을 무는 동물이라 생각하고 세상의 모든 소는 죄다 성난 황소일 거라 여기는 겁많고 심약한 이 어머니는 자녀들에게도 자기 것과 똑같은 소심함을 고스란히 물려줄 것이다."

 

자녀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인 남자 얘기를 해보자. "일찍이 지혜롭지 못한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물려받았던 것을 자기 아내에게서 기어코 찾아내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자녀들을 다 자란 사람으로 여기는 걸 보면 화들짝 놀란다."

 

우리는 종종 '스텝포드 와이프(Stepford Wif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이라 레빈(Ira Levin)의 소설에서 아내들이 모두 로봇으로 대체되는 내용으로부터 비롯된 표현이다. 이 용어는 남편의 행복을 위해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아내를 빗대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원작 소설의 주요 타깃은 다름 아닌 스텝포드 '맨'이다.

 

사실 이 소설이 표적으로 삼는 대상은, 남자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할 여성과는 절대 결혼하지 못하는 남자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스텝포드 커플을 비웃을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 쪽만 비난해선 안 된다. 그 커플의 남편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혹시 지금의 아내 대신 당돌하게 당신에게 반대를 표하는 누군가와 결혼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신지요?

 

아이가 '내 친구 엄마는 걔한테 해도 된다고 했단 말이야' 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가? 아이가 친구 엄마를 비장의 카드처럼 써먹지 못하게 하라. 지금 당장 사회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라. '내 친구 엄마' 카드야 잠깐 반짝하고 말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여전히 내 아이의 행복을 책임질 사람은 아이 친구 엄마가 아니라 바로 자산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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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도 모르다니!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녀석이군.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흉은 우리 자식들일까, 아니면 우리의 뒤틀린 이기심일까?

 

자기 새끼를 잡아먹는 물고기 구피를 제외한다면,
인간은 일부러 아이를 낳은 유일한 동물이다.
-P.J. 오루크(P.J. O'Rourke)

 

행복의 정복을 위한 작지만 중대한 공헌을 한 전구 농담 시리즈(lightbulb jokes, 블랙 코미디의 일종)는 버트런드 러셀 시대 이후에 나왔을 것이다. 적어도 러셀의 연설이나 라디오 방송에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이 이야기는 러셀의 책에 나온 게 아니다.

"전구를 갈려면 몇 명의 어머니가 필요하게?"

"걱정 마. 난 그냥 어두운 데서 혼자 안자 있을래."

 

자기 아이에게 힘을 행사하길 즐기는 부모, 상호간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힘을 행사하는 부모라면 이기심이라는 습관을 고집스레 익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자녀의 독립을 반대하는 이유는 흔한 말로 "애들이 곤경에 처할까봐"가 아니라, 부모로서 우리 자신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녀를 이용하는 즐거움이 줄어들어서다.

 

러셀은 이런 얘기를 한다. 왕년의 삶이 행복했던 어머니들이 있다. 예전 삶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 어머니들에게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거의 장기적 행복을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할 의무다. 러셀이 1930년대의 여성들에게 권고했던 내용은 남자들처럼 자기 권리를 찾아 다시 직장에 복귀하라는 것, 그리고 일을 통해 똑같은 혜택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어떤 종류든 상관없이 전문적 기술을 습득한 여성에게도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있지만 여성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반드시 그 기술을 계속 사용할 자유를 누려야 한다...사회가 어머니에게 불합리한 수준의 과도한 자식 사랑 내지는 희생을 요구할 때마다 그 어머니는 굉장한 성자가 아닌 이상 자기 자식에게 적정 수위를 넘어선 보상을 기대할 것이다."

 

사실상 러셀이 말하는 내용은, '날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잔하요'라는 투로 10대들이 부모의 훈육에 반박하는 주장을 펴는 게 얼마간 의미 있다는 얘기다. 자녀가 아기일 때 부모가 희생을 감수했다고 해서 자식이 그 희생을 조정할 존재였던 건 아니다. 따라서 자식을 노후의 협상 카드처럼 이용하는 태도는 그저 방종으로 볼 수밖에 없다.

 

혹시 러셀의 논조가 못마땅하다 못해 혈압이 오를 정도인가? 그렇다면 이 말은 어떤가. "대다수의 경우, 전통적인 관점에서 자기희생의 표본이 되는 어머니는 자기 자녀에게 유난히 이기적이다."

 

러셀은 우리에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주식 중개인이 되거나 무책임한 엄마가 되라고 말하는 게아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현실적인지를 말하면서, 자녀를 전문가 손에 맡기는 게 결코 패배가 아니라고 안심시킨다. 그리고 아버지들은 본인 일상을 꾸리다 잠깐씩 짬이 날 때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데 어머니들은 왜 아이를 위해 인생 전부를 희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러셀의 결론. "앞으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현재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점점 더 많이 닮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여성의 삶이 쓸데없는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면 말이다."

자녀의 친구와 그 부모를 잘 알고 있다면 자녀를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재울 수 있다. 이렇게 친구 집에서 자는 것 외에도 캠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녀가 집을 떠나 다른 데서 자고 오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아이의 외박은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도움이 된다. 아이는 사교성을 키울 좋은 기회를 얻게 되고, 부모는 가끔씩 심신의 긴장을 푸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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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흡연에 관한 한 절대적 지지를 표했지만 술꾼한테는 그다지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술 몇 잔 덕분에 진실을 보는 눈을 얻게 된다는 생각을 영 못마땅해했다.

 

술은 인생이라는 수술 과정을 견디게 해주는 마취제다.
-조지 버나드 쇼(Geroge Bernard Shaw)

하지만 그게 우리들 모습 아닌가. 술 몇 잔에 우리는 불현듯 눈이 밝아진다. '자, 이제 단념할 때다.' '난 여자 친구를 정말정말 사랑해. 그러니까 곡 결혼해야겠어.' '나랑 가장 친한 친구가 빌어먹을 녀석이야. 그 사실을 알게 해줄 필요가 있다.' 

'발리로 이사 가서 바닷가 마을에 살 때가 됐어.' 술을 마시면 이처럼 결심이 또렷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감정은 항상 위험했다. 술의 힘을 빌리면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낼 수 있고, 자신의 궁극적 목표에 완벽히 부합하는 듯한 마법 같은 새벽 두 시의 전화 통화도 할 수 있고, 원하는 시간 언제든 비행기표를 예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확실하고 명료한 순간에 벌인 일인데도 그것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적이 숱하게 많다. 우리가 감상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생각이 있다. 술 취한 자아야말로 진정한 우리 모습이라는 생각, 술이 없었다면 다다르지 못했을 자아의 본질이 바로 술 취한 자아 속에 고이 웅크리고 있다는 생각.

 

하지만 러셀은 이런 생각은 그저 게으른 사고방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내놓은 몇 가지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있는 그대로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술에 취했을 때 다른 모습이 된다면 그건 잠잘 때의 우리 상태처럼 '진짜' 모습이 아니다. "약해진 순간이야말로 강건할 때보다 더 나은 통찰력을 부여한다는 가정은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러셀은 이렇게 일갈한다. 술에 취하면 자기 무의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무의식의 소리를 듣는 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무의식이 소리를 빽빽 지르는 순간은 그리 소중하지 않다. '케밥 먹고 싶어', '여자 친구한테 키스하고 싶다', '너, 운전해도 괜찮아', '그 남자가 널 같잖게 쳐다보고 있어', '걔는 뭐가 문제라니?' 이런 무의식은 그다지 중요한 얘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무의식과 우리 삶을 통합시키는 이성적 사고와 운동 기능이 있다. 이런 능력이 유효한 경우에는 우리 무의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와인 한 잔 마시고 어김없이 눈물을 터뜨린다면 우리 요구와 욕망을 삶과 통합시켜야 하는 책임을 나 몰라라 회피하는 꼴이 된다. "합리적인 순간과 비합리적인 순간이 교대로 나타나는 것에 절대 만족해서는 안 된다." 러셀의 간명한 당부다.

 

물론 지키기 쉬운 말은 아니다. 우리는 의식적 욕망의 뚜껑을 꼭 닫아두는 데 아주 능숙하다.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은 쓸데없는 것일 수도 있다. 술이 취했을 때 피에로와 싸우고 싶어진다면 무의식의 말을 듣고 술이 깬 후 서커스장에 가서 피에로와 한판 붙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피에로들이 서로 똘똘 뭉쳐 그 큰 신발로 반격할 경우 기겁할 고통을 겪을 수도 있으니 부디 싸움은 벌이지 않는 게 좋다. 통홥하라는 말은 무의식의 명령을 경청하라는 게 아니라 무의식을 훈련시키라는 뜻이다. 러셀은 우리 모두 훈련과 자기반성을 통해 무의식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무의식 훈련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면 카운슬러나 그룹 치료, 인지행동 치료 같은 게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끝없이 불행하고 정신 사나운 속수무책의 술꾼인 경우, 다시 술에 취한다고 고통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값비싼 죽음을 치를 도리밖에 없다. 아마 러셀은 비범한 본인에 비해 재능이 덜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무의식 훈련에서 겪을 문제를 과소평가한 것 같다. 그렇지만 러셀이 우리에게 "자존심을 잃고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한 말은 전적으로 옳다. 무의식 훈련이 아무리 어려워도 자존심 지키기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작 술 때문에 자존심을 잃기는 너무 억울하고 께름칙하다.

 

술을 마실 때 감정이 과해지는 건 무의식 속의 생각이 우리 스스로의 저항력을 뚫고 나아가려고 몸부림친다는 뜻이다. 어떤 것도 숨기거나 억누르지 않는 솔직한 일기를 써보라. 자기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생각을 뚜렷하게 정리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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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모, 작당, 음모 이런 단어에 괜스레 마음이 끌리고 흥분한다. 하지만 음모는 우리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개인이 되는 데에는 방해가 될 뿐이다.

 

지금까지 가장 거대한 음모는 음모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당신을 잡으려고 계획하지 않는다.
아무도 당신이 사는지 죽는지 전혀 관심도 없다.
자, 이제 기분이 좀 나아지는가?
-데니스 밀러(Dennis Miller)

 

음모이론은 인터넷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러셀은 1930년 버전의 음모이론광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사람이 수차례 퇴짜 놓은 게 이 남자한테 꽤나 인상 깊게 박혔던 모양이다. 이 남자는 모든 권력자들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자 범죄 사실을 무마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고 믿는다."

 

러셀이 이 글을 쓰던 시절에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시온 의정서(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라는 위조문서를 믿었다. 이 문서는 유대인 비밀 결사대가 전 세계 정부를 조종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문건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이 문서가 사실이라고 믿었다. 이 음모이론은 1905년에 공론화되었는데 이를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 중에 심지어 헨리 포드도 있었다.

 

이 '의정서'에 관한 맹신이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광범위하게 퍼진 반유대주의 대문이었다. 그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유대인 배척 사상이 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공광이 닥쳤다.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기 대문에 사람들은 가족들 입에 풀칠하느라 갖은 애를 썼다. 그리고 회사들은 힘들게 대출을 받거나 아예 문을 닫았다. 대공황과 반유대주의가 뒤섞여 묘한 반향을 일으켰다. 퍽퍽하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한 경제 상황의 분풀이를 유대인에게 하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처럼 유치한 방식으로 책임 전가 대상을 찾아내야 우리 마음이 편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예측하며 그게 당연한 상태라고 느낀다. 그리고 행복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상태는 곧 성공뿐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가 실패와 맞닥뜨리는 경우, 틀림없이 특별한 상황이나 음모 때문에 실패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울분을 토한다.

 

이런 피해망상증에는 어떤 치료약이 필요할까? 러셀은 다음과 같은 처방전을 내놓는다.

 

1. 우리의 진의나 동기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늘 이타적이진 않다. 그 동기가 나의 본바탕을 위태롭게 하는가? 이타적이지 않은 동기, 그 동기를 누그러뜨리고 싶다는 바람, 이 두 가지가 다투는데 후자가 밀리고 있는가? 권력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러셀은 "가장 고결한 사람의 행동도 상당 부분 이기적인 동기로 꽉 차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묘한 재미를 더해준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으나 우리에게 윤리적 비판 면책권을 주지는 않는다.

 

2. 자신의 장점을 과대평가하지 말라. 능력이 모자라니까 승진이 안 된 것일 수 있다. 항상 인정받고 칭찬받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말라. 또한 칭찬이 부족하다고 분개하지도 말라.

 

3.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당신이 관심을 쏟는 만큼 그들도 당신에게 관심을 보일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 당신은 집착하고 끙끙대지만 그들은 당신한테 관심도 없다.

 

4.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 또는 어떤 상황에 크게 기여하는 이들에게 모종의 계획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말라. 세상에는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을 열 받게 하는 행동만 하는 직장 상사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자기 결론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러셀은 음모이론이란 곧 불쾌한 진실로부터의 도피라고 믿는다. 우리가 타인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거나 그저 충분치 못한 존재라는 사실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아 음모이론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 결함을 바로잡으면서, 또는 다른 부분에서 성공하기 위해 애쓰면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비겁하게 자신의 불완전함 속에 숨어서 가장의 음모와 계략을 만들어내면, 결국 우리가 창조해낸 괴물들을 두려워하며 살라는 실형 선고가 내려지고 만다.

 

혹시 자기 주변에서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14세기의 윌리엄 오브 오컴(William of Ockham, 중세 영국의 철학자이자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도사)이 공식화한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이라는 원리를 적용해보라. 이 원리에 다르면, 복잡한 설명과 단순한 설명이 있을 때 단순한 설명이 답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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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어린 충절은 특별한 선물이지, 칼 같은 사업 거래가 아니다. 행여 사랑 담긴 충성이 거래처럼 취급된다면 그 인간관계에 개입된 모든 이들의 행복이 줄어들고 만다.

 

돈으로 산 충절은 돈으로 파괴될 수 있다.
-세네카(Seneca)-

 

매년 여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자기 클럽에 평생의 충성을 서약하며 지난 열 달을 보냈던 축구 선수들, 그 클럽의 팬, 그리고 팀 동료들은 클럽을 이리저리 맞바꾼다. 그러면서 선수들은 새로 몸담게 된 클럽에서 뛰는 게 꿈이었다고 말하며 새로이 충성을 맹세한다. 그리고 다음 해엔 또 다른 변화가 생긴다. 프로 축구팀의 세계는 늘 이런 패턴으로 흘러간다.

 

대개의 경우 이 축구 선수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진짜 대상은 인상을 약속받은 몸값이다. 선수들이 다른 나라 다른 리그로 이적해갈수록 평생의 충성 서약, 아니면 최소한 경력상의 충성 서약은 바로 눈앞의 사람들을 향하게 돼 있다. 에이전트,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 스폰서, 변호사 등등.

 

어떤 선수는 자기 클럽에 과장된 충성 서약을 바친다. 해당 클럽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런 서약을 하는 선수를 향해 축구팬들이 조롱을 보내는 표현이 있다. '배지 키서(Badge Kisser)'가 바로 그것. 최근 축구 역사에서 가장 웃긴 얘기 중 하나가 바로 영국 축구 선수 애슐리 콜(Ashley Cole)에 관한 내용인데 그가 한때 배지 키서처럼 군 적이 있다. 그가 쓴 자서전에 박장대소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내 마음과 영혼은 단단한 매듭처럼 아스날에 묶여 있었다. 감히 후디니(탈출 묘기의 일인자)도 그 매듭을 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뒤 아스날이 새 계약서에 고작 주당 5만5000파운드라고 명시하자 애슐리는 주저 없이 진로를 변경해 첼시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축구의 세계에서 사랑이 매매 가능한 상품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고이 사랑을 전하는 우리의 동기는 종종 진의가 의심된다. 러셀이 설명하듯 사랑을 주거나 사랑을 즐기는 우리의 동기가 본인의 주장과 같지 않다면 우리는 절대 행복할 리 없다.

 

자신이 배를 타고 해안을 유람 중이라고 가정해보자. 아마 애정 어린 눈으로 해안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배가 가라앉고 당신은 애정 어린 눈으로 다시 한 번 해안선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변을 향해 헤엄쳐 가는 물에 빠진 사람의 애정이다.

 

두 시선의 차이는 명확하다. 자신 있고 안전한 상태에서 비롯된 첫 번째 애정, 그리고 두려움에서 나오는 두 번째 애정. 후자는 곧 자기중심적인 애정이다.

 

다르게 풀어보자. 우리는 가족, 친구, 동료, 축구 클럽 같은 여러 가지 집단 속에서 사랑과 충성을 표현한다. 이 모든 집단 속에는 안정감과 불안감이 혼재돼 나타난다. 즉 러셀의 분석대로, 아낌없이 정성스럽게 전해지는 사랑에 열정까지 보태진 안정감과 해변을 향해 헤엄쳐 가는 물에 빠진 사람이 느끼는 불안감이 있다. 후자의 경우에서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기초한다. 두려움이 더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는 행복한 관계가 성립되지 못한다.

 

계약을 통해 얻게 되는 무언가 때문에 사랑을 준다면 이건 진짜 사랑이 아니다. 기대했던 걸 얻지 못하거나 경쟁자가 더 큰 클럽에 영입되는 등 다른 사람이 똑같은 상황에서 더 좋은 제안을 받는다면 실망감이 따라올 뿐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충성스러운 사랑은 분명 특별한 선물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용기이기도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심과 경계 가운데 사랑에 대한 경계야말로 진정한 행복에 가장 치명적일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를 업무적으로 대하기란 오히려 쉬운 일이다. "네가 저걸 하면 내가 이걸 할게" 단계는 그나마 미약한 수준이지만, 이 단계가 "네가 저걸 '안' 하니까 나도 이걸 '안' 하는 거야" 단계로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면 이젠 슬슬 새로운 친구, 직장, 애인을 찾아 나서라는 신호가 온 건지도 모른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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