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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 우리는 질투와 선망이라는 정치학을 발동시키길 좋아한다. 힘든 일이 생기면 당연히 약이 오르고 화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을 두고 타인을 비난한다고 해서 행복감이 더 커지지는 않는다.

 

평균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건
평균을 깎아먹는 짓이다.

-윌리엄 M 와이넌스(William M. Winans)

 

최근 영구에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부활하는 조짐이 보인다. 주된 표적은 이민자들이다. 질투에 푹 절어 있는 데다 자기들 눈에 부정하다고 보이는 것을 바로잡아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괜히 이민자들을 걸고넘어지는 이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러셀의 말대로 우리 모두는 "숲에서 길을 잃었다". 그 숲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한편으로 보면 불평등이 질투를 양산하는 게 맞다. 러셀은 만약 불평등이 실재한다면 질투를 사라지게 하는 게 가능하거나 올바른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불평등 상황이 눈에 띄는 순간 그 불공평함을 없애는 것 외에는 질투를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 얘기는 질투를 사라지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면 정의가 실현될 거라는 환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말하자면 이 환상은 고작해야 "최악의 가능성에서 나올 만한" 어쭙잖은 정의다.

 

불행한 사람들이 보다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게 만들기보다는, 운이 좋은 사람들이 덜 즐거워지게 만드는 데 집중하는 그 어떤 정의 체계도 결코 옳지 않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어떠한가. 자동차 보험에 들지 않는 방법으로 돈을 절약하는 사람들은 경찰들이 웬만해선 자기를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단순히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다. 혹시나 그들이 내 차 후미를 들이받아 박살내기 전에 어떻게든 그 무책임한 사람들의 기쁨을 조금씩 줄이는 게 적절한 대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행복을 보호하기 위해 남의 행복을 깎아내리는 건 불행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방편으로서 사용 가치가 있는 일반 원칙이다. 말하자면 낮은 수준의 대응책이다. 일단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 있는 것만큼 흡족한 일은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뤄내는 성취는 보통 우수리를 잘라버리는 현상을 낳는다. 질투심에 눈먼 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평범의 범주로 끌어들인다. 0과 1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1로 올라가기보다는 뒤에 붙은 숫자가 무엇이든 불문하고 모두 0으로 끌어내려지는 셈이다.

 

톰 피터스(Tom Peters)와 로버트 워터맨(Robert H. Wateman)이 쓴 '초우량 기업의 조건(In Search of Excellence)은 거의 30년간 경영서적계의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초판 발행 후 4년간 약 300만 부가 팔린 책이다. 피터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초우량이라는 수식어를 제대로 구체화시킨 43개의 기업을 조사해 그 발전의 근간을 책으로 정리했다. 다른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아 따라 할 수 있도록 초우량 기업의 조건을 포착해보자는 게 피터스의 의도였다.

 

하지만 그의 동기 부여가 썩 훌륭했던 건 아니다. 출판 20주년 기념식에서 피터스는 이런 말을 남긴다. "나의 계획은 바로 이거였다. 내가 진정, 매우 깊이, 극심하게 열 받았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피터스는 다른 경영 전문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와 전직 미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s) 때문에 짜증이 났던 것이다. 드러커는 사회 구조에 너무 지나치게 호의를 보였고 맥나마라는 회계 원칙을 전쟁 관리에 도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둘이 만들어낸 체계는 당시의 표준적 관례로 자리 잡아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던 터라 피터스 입장에서는 영 마뜩찮을 뿐이었다.

 

그래서 피터스는 드러커와 맥나마라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사를 쓴느 대신 책을 출판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상황이 더 좋은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을 써서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을 분발케 하는 쪽을 택했다. 애초의 동기가 칭찬받을 만하진 않지만 결국 똑똑한 선택을 한 셈이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잡담과 쑥덕공론은 누가 뭘 아주 잘했느니, 그 정도면 당연히 상을 받을 만했느니 하는 훈훈한 칭찬이나 덕담과는 거리가 멀다. 나보다 일을 덜 한다느니, 얄밉게 더 많이 챙겨 간다느니 하는 얘기가 주를 이룰 것이다. 그런 뒷공론에 괜한 마음고생하지 말고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들고 직접 상사를 찾아가라. 그리고 온 사방에 독기를 퍼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연습을 해보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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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상아탑에 바쳤던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우리한테 들려줄 굉장한 조언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가 내민 건 임시변통의 응급조치나 죽효약이 아니었다. 성질 급한 우리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다소 특별한 처방이었다.

 

매사에 가능한 한 단순하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은 수준에서 적당히.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러셀은 철학이 엘리트들의 훈련법이라고 믿었다. 자기 입장에서 보면 철학은 대체로 엘리트한테나 해당 사항이 있는 분야였다. 더 너른 세계를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용적 목적으로 활용해서 어떤 결과를 얻겠다는 건 도통 러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비친 1920~3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에만 온통 관심을 쏟았고, 당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생각하는 바가 곧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모습은 현대의 우리 모습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중이 사상가들의 견해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이 러셀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러셀은 신문 칼럼을 시작으로 교육, 종교, 결혼 등에 관한 책을 거침없이 써낼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즈음에는 그간 러셀의 손과 머리에서 나온 글줄기가 엄청난 방류량을 보여줄 정도였다.

 

러셀의 활발한 저작 활동을 두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이해시킨다는 명분하에 '지나치게 단순화'한 글을 남발한 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러셀의 글쓰기 작업은 곧 대중화 작업이었다. 지나친 단순화와 대중화 사이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러셀은 자기 인식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이 책에서는 그 어떤 심오한 철학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넌지시 건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과감히 바라건대, 행복의 부재로 고통받는 뭇사람들이 자기 상황을 진단하고 탈출 경로를 찾아냈으면 한다."

 

러셀은 자신의 논리를 쓸모없는 간략 정보로 압축하지 않는다. 그의 책은 우리가 대가를 치르고 손에 쥐는 그런 종류의 행복을 전해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의 우울함을 거둬가지도 않는다. 하루에 다섯 번 웃는 방법이라든가 재미있게 사는 열 가지 기술을 전해주는 것도 아니며 아주 확실한 삶의 안전장치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오늘날의 축구 감독과 CEO들은 직업적 측면에서 자기만의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도 '인생철학'이랍시고 '절대 사과하지 않기' 같은 신조를 품고 사는 꼴통들이 있다. 이런건 철학이라기보다 역겨움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러셀은 대중을 상대하면서 함부로 성공을 약속하는 덫에 빠지지 않는다. 어려운 개념에 쉬운 꼬리표를 붙이지 않고 쉬운 결과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행복을 얻는 게 쉬운 일이라는 확신을 주지도 않는다. 러셀의 책은 패배할 공산이 클 수밖에 없는 험한 인생 전투를 상정하면서 이를 이겨내자는 의지를 공고히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낼 행복의 '정복'을 약속한다. 러셀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고되고 힘든 전투이자 가장 혼란스러운 문제, 다시 말해 행복을 위한 고군분투를 마냥 단순화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러셀을 통해 보장받는 것은 훨씬 풍요로운 미래다. 그가 제시한 미래는 '명료한 사고'와 '결론에 도달하기'라는 방법을 통해 가능하다. 논리의 가치, 사고를 통제하는 치료적 가치, 쉬운 해결법을 거부하는 자세가 바로 러셀의 방식이다.

 

오늘날의 행복은 산업과 같다. 말하자면 러셀은 우리 인생에서 행복 산업의 잠재력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잡지 기사들이 우리를 괴롭혀가며 읊어대는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메시지를 전해준다.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내용으로 우리 눈과 귀를 사로잡던 텔레비전 프로그램과도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적어도 러셀은 우리를 어른으로 대우해주면서 우리 스스로도 자신을 어른 취급해야 한다는 걸 일깨워준다.

 

당신은 자기계발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집어 드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년 동안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 책, 잡지, 인터넷, CD 등을 바로보던 시각을 달리해보라. 그리고 그 수많은 자료들이 영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온다면 과감히 던져버리라. 최소한 책장에 빈 공간을 확보하는 소득은 얻을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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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흡연에 관한 한 절대적 지지를 표했지만 술꾼한테는 그다지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술 몇 잔 덕분에 진실을 보는 눈을 얻게 된다는 생각을 영 못마땅해했다.

 

술은 인생이라는 수술 과정을 견디게 해주는 마취제다.
-조지 버나드 쇼(Geroge Bernard Shaw)

하지만 그게 우리들 모습 아닌가. 술 몇 잔에 우리는 불현듯 눈이 밝아진다. '자, 이제 단념할 때다.' '난 여자 친구를 정말정말 사랑해. 그러니까 곡 결혼해야겠어.' '나랑 가장 친한 친구가 빌어먹을 녀석이야. 그 사실을 알게 해줄 필요가 있다.' 

'발리로 이사 가서 바닷가 마을에 살 때가 됐어.' 술을 마시면 이처럼 결심이 또렷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감정은 항상 위험했다. 술의 힘을 빌리면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낼 수 있고, 자신의 궁극적 목표에 완벽히 부합하는 듯한 마법 같은 새벽 두 시의 전화 통화도 할 수 있고, 원하는 시간 언제든 비행기표를 예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확실하고 명료한 순간에 벌인 일인데도 그것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적이 숱하게 많다. 우리가 감상적으로 고수하고 있는 생각이 있다. 술 취한 자아야말로 진정한 우리 모습이라는 생각, 술이 없었다면 다다르지 못했을 자아의 본질이 바로 술 취한 자아 속에 고이 웅크리고 있다는 생각.

 

하지만 러셀은 이런 생각은 그저 게으른 사고방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내놓은 몇 가지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있는 그대로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술에 취했을 때 다른 모습이 된다면 그건 잠잘 때의 우리 상태처럼 '진짜' 모습이 아니다. "약해진 순간이야말로 강건할 때보다 더 나은 통찰력을 부여한다는 가정은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러셀은 이렇게 일갈한다. 술에 취하면 자기 무의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무의식의 소리를 듣는 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무의식이 소리를 빽빽 지르는 순간은 그리 소중하지 않다. '케밥 먹고 싶어', '여자 친구한테 키스하고 싶다', '너, 운전해도 괜찮아', '그 남자가 널 같잖게 쳐다보고 있어', '걔는 뭐가 문제라니?' 이런 무의식은 그다지 중요한 얘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무의식과 우리 삶을 통합시키는 이성적 사고와 운동 기능이 있다. 이런 능력이 유효한 경우에는 우리 무의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와인 한 잔 마시고 어김없이 눈물을 터뜨린다면 우리 요구와 욕망을 삶과 통합시켜야 하는 책임을 나 몰라라 회피하는 꼴이 된다. "합리적인 순간과 비합리적인 순간이 교대로 나타나는 것에 절대 만족해서는 안 된다." 러셀의 간명한 당부다.

 

물론 지키기 쉬운 말은 아니다. 우리는 의식적 욕망의 뚜껑을 꼭 닫아두는 데 아주 능숙하다.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은 쓸데없는 것일 수도 있다. 술이 취했을 때 피에로와 싸우고 싶어진다면 무의식의 말을 듣고 술이 깬 후 서커스장에 가서 피에로와 한판 붙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피에로들이 서로 똘똘 뭉쳐 그 큰 신발로 반격할 경우 기겁할 고통을 겪을 수도 있으니 부디 싸움은 벌이지 않는 게 좋다. 통홥하라는 말은 무의식의 명령을 경청하라는 게 아니라 무의식을 훈련시키라는 뜻이다. 러셀은 우리 모두 훈련과 자기반성을 통해 무의식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무의식 훈련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면 카운슬러나 그룹 치료, 인지행동 치료 같은 게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끝없이 불행하고 정신 사나운 속수무책의 술꾼인 경우, 다시 술에 취한다고 고통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값비싼 죽음을 치를 도리밖에 없다. 아마 러셀은 비범한 본인에 비해 재능이 덜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무의식 훈련에서 겪을 문제를 과소평가한 것 같다. 그렇지만 러셀이 우리에게 "자존심을 잃고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한 말은 전적으로 옳다. 무의식 훈련이 아무리 어려워도 자존심 지키기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작 술 때문에 자존심을 잃기는 너무 억울하고 께름칙하다.

 

술을 마실 때 감정이 과해지는 건 무의식 속의 생각이 우리 스스로의 저항력을 뚫고 나아가려고 몸부림친다는 뜻이다. 어떤 것도 숨기거나 억누르지 않는 솔직한 일기를 써보라. 자기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생각을 뚜렷하게 정리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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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모, 작당, 음모 이런 단어에 괜스레 마음이 끌리고 흥분한다. 하지만 음모는 우리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개인이 되는 데에는 방해가 될 뿐이다.

 

지금까지 가장 거대한 음모는 음모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당신을 잡으려고 계획하지 않는다.
아무도 당신이 사는지 죽는지 전혀 관심도 없다.
자, 이제 기분이 좀 나아지는가?
-데니스 밀러(Dennis Miller)

 

음모이론은 인터넷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러셀은 1930년 버전의 음모이론광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사람이 수차례 퇴짜 놓은 게 이 남자한테 꽤나 인상 깊게 박혔던 모양이다. 이 남자는 모든 권력자들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자 범죄 사실을 무마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고 믿는다."

 

러셀이 이 글을 쓰던 시절에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시온 의정서(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라는 위조문서를 믿었다. 이 문서는 유대인 비밀 결사대가 전 세계 정부를 조종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문건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이 문서가 사실이라고 믿었다. 이 음모이론은 1905년에 공론화되었는데 이를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 중에 심지어 헨리 포드도 있었다.

 

이 '의정서'에 관한 맹신이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광범위하게 퍼진 반유대주의 대문이었다. 그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유대인 배척 사상이 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공광이 닥쳤다.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기 대문에 사람들은 가족들 입에 풀칠하느라 갖은 애를 썼다. 그리고 회사들은 힘들게 대출을 받거나 아예 문을 닫았다. 대공황과 반유대주의가 뒤섞여 묘한 반향을 일으켰다. 퍽퍽하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한 경제 상황의 분풀이를 유대인에게 하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처럼 유치한 방식으로 책임 전가 대상을 찾아내야 우리 마음이 편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예측하며 그게 당연한 상태라고 느낀다. 그리고 행복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상태는 곧 성공뿐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가 실패와 맞닥뜨리는 경우, 틀림없이 특별한 상황이나 음모 때문에 실패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울분을 토한다.

 

이런 피해망상증에는 어떤 치료약이 필요할까? 러셀은 다음과 같은 처방전을 내놓는다.

 

1. 우리의 진의나 동기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늘 이타적이진 않다. 그 동기가 나의 본바탕을 위태롭게 하는가? 이타적이지 않은 동기, 그 동기를 누그러뜨리고 싶다는 바람, 이 두 가지가 다투는데 후자가 밀리고 있는가? 권력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러셀은 "가장 고결한 사람의 행동도 상당 부분 이기적인 동기로 꽉 차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묘한 재미를 더해준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으나 우리에게 윤리적 비판 면책권을 주지는 않는다.

 

2. 자신의 장점을 과대평가하지 말라. 능력이 모자라니까 승진이 안 된 것일 수 있다. 항상 인정받고 칭찬받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말라. 또한 칭찬이 부족하다고 분개하지도 말라.

 

3.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당신이 관심을 쏟는 만큼 그들도 당신에게 관심을 보일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 당신은 집착하고 끙끙대지만 그들은 당신한테 관심도 없다.

 

4.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 또는 어떤 상황에 크게 기여하는 이들에게 모종의 계획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말라. 세상에는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을 열 받게 하는 행동만 하는 직장 상사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자기 결론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러셀은 음모이론이란 곧 불쾌한 진실로부터의 도피라고 믿는다. 우리가 타인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거나 그저 충분치 못한 존재라는 사실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아 음모이론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 결함을 바로잡으면서, 또는 다른 부분에서 성공하기 위해 애쓰면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비겁하게 자신의 불완전함 속에 숨어서 가장의 음모와 계략을 만들어내면, 결국 우리가 창조해낸 괴물들을 두려워하며 살라는 실형 선고가 내려지고 만다.

 

혹시 자기 주변에서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14세기의 윌리엄 오브 오컴(William of Ockham, 중세 영국의 철학자이자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도사)이 공식화한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이라는 원리를 적용해보라. 이 원리에 다르면, 복잡한 설명과 단순한 설명이 있을 때 단순한 설명이 답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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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어린 충절은 특별한 선물이지, 칼 같은 사업 거래가 아니다. 행여 사랑 담긴 충성이 거래처럼 취급된다면 그 인간관계에 개입된 모든 이들의 행복이 줄어들고 만다.

 

돈으로 산 충절은 돈으로 파괴될 수 있다.
-세네카(Seneca)-

 

매년 여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자기 클럽에 평생의 충성을 서약하며 지난 열 달을 보냈던 축구 선수들, 그 클럽의 팬, 그리고 팀 동료들은 클럽을 이리저리 맞바꾼다. 그러면서 선수들은 새로 몸담게 된 클럽에서 뛰는 게 꿈이었다고 말하며 새로이 충성을 맹세한다. 그리고 다음 해엔 또 다른 변화가 생긴다. 프로 축구팀의 세계는 늘 이런 패턴으로 흘러간다.

 

대개의 경우 이 축구 선수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진짜 대상은 인상을 약속받은 몸값이다. 선수들이 다른 나라 다른 리그로 이적해갈수록 평생의 충성 서약, 아니면 최소한 경력상의 충성 서약은 바로 눈앞의 사람들을 향하게 돼 있다. 에이전트,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 스폰서, 변호사 등등.

 

어떤 선수는 자기 클럽에 과장된 충성 서약을 바친다. 해당 클럽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런 서약을 하는 선수를 향해 축구팬들이 조롱을 보내는 표현이 있다. '배지 키서(Badge Kisser)'가 바로 그것. 최근 축구 역사에서 가장 웃긴 얘기 중 하나가 바로 영국 축구 선수 애슐리 콜(Ashley Cole)에 관한 내용인데 그가 한때 배지 키서처럼 군 적이 있다. 그가 쓴 자서전에 박장대소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내 마음과 영혼은 단단한 매듭처럼 아스날에 묶여 있었다. 감히 후디니(탈출 묘기의 일인자)도 그 매듭을 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뒤 아스날이 새 계약서에 고작 주당 5만5000파운드라고 명시하자 애슐리는 주저 없이 진로를 변경해 첼시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축구의 세계에서 사랑이 매매 가능한 상품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고이 사랑을 전하는 우리의 동기는 종종 진의가 의심된다. 러셀이 설명하듯 사랑을 주거나 사랑을 즐기는 우리의 동기가 본인의 주장과 같지 않다면 우리는 절대 행복할 리 없다.

 

자신이 배를 타고 해안을 유람 중이라고 가정해보자. 아마 애정 어린 눈으로 해안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배가 가라앉고 당신은 애정 어린 눈으로 다시 한 번 해안선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변을 향해 헤엄쳐 가는 물에 빠진 사람의 애정이다.

 

두 시선의 차이는 명확하다. 자신 있고 안전한 상태에서 비롯된 첫 번째 애정, 그리고 두려움에서 나오는 두 번째 애정. 후자는 곧 자기중심적인 애정이다.

 

다르게 풀어보자. 우리는 가족, 친구, 동료, 축구 클럽 같은 여러 가지 집단 속에서 사랑과 충성을 표현한다. 이 모든 집단 속에는 안정감과 불안감이 혼재돼 나타난다. 즉 러셀의 분석대로, 아낌없이 정성스럽게 전해지는 사랑에 열정까지 보태진 안정감과 해변을 향해 헤엄쳐 가는 물에 빠진 사람이 느끼는 불안감이 있다. 후자의 경우에서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기초한다. 두려움이 더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는 행복한 관계가 성립되지 못한다.

 

계약을 통해 얻게 되는 무언가 때문에 사랑을 준다면 이건 진짜 사랑이 아니다. 기대했던 걸 얻지 못하거나 경쟁자가 더 큰 클럽에 영입되는 등 다른 사람이 똑같은 상황에서 더 좋은 제안을 받는다면 실망감이 따라올 뿐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충성스러운 사랑은 분명 특별한 선물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용기이기도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심과 경계 가운데 사랑에 대한 경계야말로 진정한 행복에 가장 치명적일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를 업무적으로 대하기란 오히려 쉬운 일이다. "네가 저걸 하면 내가 이걸 할게" 단계는 그나마 미약한 수준이지만, 이 단계가 "네가 저걸 '안' 하니까 나도 이걸 '안' 하는 거야" 단계로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면 이젠 슬슬 새로운 친구, 직장, 애인을 찾아 나서라는 신호가 온 건지도 모른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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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아이를 낳아야 할까? 당신이 포기한 인생을 자녀가 대신 완성시켜줄 거라는 기대를 하는가? 러셀은 이런 나태한 기대를 하는 사람들을 향해 따끔한 주의를 준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갖는 비결:
상황이 이렇게 저렇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잘 돌아가리라 기대하지 않기.

-신디 추팩(Cindy Chupack)

 

러셀이 본 부모와 자녀의 관계. "열에 아홉은 양쪽 모두 서로가 불행의 원인. 백에 아흔아홉은 최소한 한쪽에게 불행의 씨앗." 풍자 언론 '어니언(The Onion)' 신문은 2007년 보도에서 미국의 부모 95퍼센트가 자녀를 학대한다는 가상의 결과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저녁 식사 전에 과자 못 먹게 하기'처럼 정도가 덜한 위반부터 '원하는 걸 절대 못 갖게 하기', '장기간 무시하기' 같은 보다 지독한 위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대가 유형별로 기록돼 있다."

 

호르몬 넘치는 아이들의 감정을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애초에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조절할 수 있다. 러셀은 현대 어머니들의 딜레마가 1930년대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분석 내용을 제시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삶이 좋지만 정말로 아이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요즘 추세는 '몽땅 한꺼번에'가 가능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실제 현실 상황을 반영하기보다는 언론에 기세 좋게 등장하는 슈퍼맘이 보통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구조로 흘러간다.

 

여기서 러셀은 일하는 미혼 여성을 언급한다. 이 여성들은 자기만의 수입이 있고 사회적 지위도 갖추었으며 안락한 생활을 하고 흥미로운 자극을 얻을 기회도 많았다고 한다. 엄마가 된다는 건 아마도 이상의 여러 가지 중 적어도 몇 개는 사라진다는 뜻이다.

 

"엄마가 된 여성은 집에 묶여 있다. 자신의 재능과 기술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수백 수천 가지 사소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를 받는다... 자신의 모든 매력과 7할 이상의 지성을 단기간에 잃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낮 동안의 골칫거리와 자신의 수고에 대해 말하는 여성은 성가신 사람이지만, 그조차도 말하지 못하는 여성은 정신이 딴 데 팔린 사람이다."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려줘 유감이긴 하다. 장담컨대 꼭 이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러셀은 부모와 자식 간의 특별한 유대를 저버리라는 말을 했던 게 아니다. 하지만 단지 사회가 옳은 일이라고 정한 기준 때문에 자녀를 위해 자기 인생 전부를 희생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말라고 전한다.

 

이 말이 너무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건 러셀이 의도한 게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유대가 서로를 만족시키는 요인이자 행복의 훌륭한 원천이라는 것이 곧 러셀의 논리이다. "심리적으로 볼 때 '부모됨'은 인생이 제공해야 하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지속적인 행복을 선사할 수 있다." 러셀은 부모와 자식 간에 정서적 연대가 없이는 이런 행복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덧붙인다.

 

러셀은 아이를 가지라고 권한다. "상황 때문에 이 행복을 멀리하고 있는 경우, 절실한 내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채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개인의 성취를 희생하면서 자기 삶을 자녀에게 헌신하는 풍조는 지지하지 않는다. 아이가 없을 때 본인이 행복하다면 그게 옳은 삶이다.

 

부모로서 시간을 보낼 때 장을 보러 간다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을 처리하는 데만 정신이 팔리기 쉽다. 그러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쪼개보라. 그러면 자신의 존재를 새삼 돌이켜볼 수 있고 진정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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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괴로운가? 혹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우유부단함이라는 증상이 나타난 건 아닌지 돌아볼 때다.

 

설령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 뒤에는 평온함이 따른다.
-리타 메이 브라운(Rita Mae Brown)

 

"보다 나은 인생철학과 정신 수양으로 걱정이라는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러셀이 전한 이 말에 우리 모두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낙제생 같은 기분이 든다.

 

러셀은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 훈련을 한 사람이다. 평화주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던 사람, 심심풀이로 철학책을 쓴 사람, 1 더하기 1은 2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노놓은 총 400페이지의 철학적 성과물이 단 두 줄짜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때문에 뭉개진 사람이 바로 그다.

 

낙담과 좌절이 그의 친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보통 사람이라면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였을 것 같지만 러셀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부딪힌 매 상황은 노력해서 돌파해볼 가치가 있는 도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러셀의 해결책은 다소 귀찮ㄴ고 짜증나는 구석이 있다. 대단히 효과적이면서도 우리로선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건 그런 고민에 어떤 목적이 있을 때뿐이다. 러셀은 이렇게 설명하면서 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평범한 나날의 일상적인 문제들을 차단한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러셀의 말은, 심각한 중병인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병에 대한 걱정을 아예 차단한다는 뜻이 아니다. 새벽 두 시에 찾아온 통증에 초조해하며 걱정만 할 게 아니라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가야겠다는 고민을 하는 게 더 낫다고 부르짖는 중이다.

 

문제가 생기면 가능한 한 모든 정볼을 수집해 잘 분석해본 다음 결정을 내리고, "새로운 사실이 대두되지 않는 한 결정을 번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단계는 생각 그만하기다. "우유부단함만큼 고단하고 소모적인 건 없다. 망설임처럼 무익한 건 없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고 자기가 내린 결정을 믿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라. 러셀은 걱정 금물과 자기애 기술을 무대 공포 치유에 사용했다. "내가 연설을 잘하든 못하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느끼도록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우주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제 할 일을 할 테니까."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러셀이니까 그렇게 말하기 쉽겠지.' 그래도 일단은 러셀이 스스로에게 처방한 나름의 특효약을 살펴보자. 러셀은 다음의 속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1. 겸손. 당신은 온 세상이 주목할 만큼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내일 당장 거리에서 마구 날뛰며 내키는 대로 감정을 터뜨린다고 해도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당신 모습을 찍어 제보하지 않는한, 지역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리기 힘들다. 그러니 온 세상이 자기에게 집중할 거라는 부담에서 벗어나라.

 

2. 확신. 다신이 내린 결정은 옆 사람의 말에 혹해서 나온 일시적 결과물이 아니다. 자기 확신을 가지라.

 

3. 성실. 어떤 일을 하기로 정했으면 착실히 하라. 설령 성실함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라 해도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러셀이 그런 사람이었다.

 

4. 통찰력. 당신이 수집한 정보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감정에 충실한 결정을 뒷받침해주는 그저 그런 잡동사니가 아니다. 종종 루리는 어떤 것이 진실이라는 걸 알지만 대면하기 껄끄럽다는 이유로 그 진실을 슬쩍 무시해버리곤 한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꺼이 재고해보는 의지와 열린 마음이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결정에 만족한다는 걸 확인하는 방법일 뿐이지 자신이 옳다는 걸 확인하는 방법은 아님을 명심하라.

 

영국의 전직 수상 존 메어저(John Major)의 습관 한 가지. 그는 결정을 내릴 사안이 생기면 종이 한 장을 세로로 반을 접어 한쪽에는 찬성, 다른 쪽에는 반대에 관한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우리 마음속에서 찬반이 다투는 문제가 있다면 이 방법을 사용해보라. 꽤 유용한 방식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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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우리가 느끼는 불행의 대부분이 경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도 주지 못하는 하찮은 결과물에 목숨을 걸면 우리 삶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혹시 이런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면 정말 유감이다.

 

결혼과 일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조언을 구하는 남자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글로리아 스테이넘(Gloria Steinem)

 

러셀은 사무실 업무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나 사용할 법한 언어를 써서 사무직 근로자들의 고충을 표현한다. "본질적으로 하찮은 일에 품위를 부여하기."

 

러셀은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1930년대의 평범한 사쿠직 직원들의 단상을 제시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1930년대 직장인들은 휴일에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를 챙겨 갈 필요는 없었다. 러셀은 출세를 위한 사다리가 있다는 생각, 이 사다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반기를 든다. 그 사다리는 주변 사람보다 더 성공하겠다는 눈물겨운 발버둥질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러셀의 눈에 비친 직장인들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서둘러 출근하고 밤늦게 귀가해 "만찬을 위해 옷을 차려입을 시간에 딱 맞춰"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생활을 즐기는 척 한다. 1930년대의 모습이다.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외로워지고" 아내나 자녀들이 뭘 하는지 도통 모른다. 휴일이 되어도 일 생각만 하고 있다.

 

왠지 익숙한 얘기 같지 않은가? 만찬을 위해 옷을 차려입는 부분만 배고 나머지 모두 현대인에게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우리는 일과 생활의 균형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일과 생활을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그럴듯한 장치를 파는 회사도 종종 등장한다. 그건 어디까지 그 회사의 주장이다. 이 기계들은 휴일을 맞아 해변을 찾은 당신에게 사장의 이메일을 고이 전해줘 당신의 휴식을 망치도록 고안된 것들이다.

 

공중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 받는 소리를 듣는 일이 자주 있진 않지만 어쩌다 경험하게 되면 상당히 당혹스러운 상황이긴 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이 쫓아다니는 경우다.

 

업무를 가속화하기 위해 소프트웨어를 설치한다는 말은 어떤가? 그건 당신이 일을 더 빨리 마친다는 뜻이 아니다. 애석하지만 더 많은 업무를 맡게 된다는 뜻이다.

 

일과 생활의 진짜 균형은 우리 머릿속에서 비롯된다. 휴대전화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끄고 마음까지 끌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충분히 행복을 담보한다.

 

우리가 감수하고 희생해야 할 건 무엇일까? 행복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 눈에는 돈과 지위를 희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사업가의 종교와 영예는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다짐과 요구다. 그래서 그는 기쁘게 고통을 감수한다." 돈은 어느 정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보다 폭 넓은 차원이 아니라 돈과 권력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겨다줄 뿐이다.

 

우리는 사업가, 고도성장, 모험가, 억만장자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조사에 다르면 예상과 달리 수많은 군소 기업체들이 기업 성장을 그다지 원치 않는다고 한다. 소규모 회사의 사업가들은 자녀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저 조금 더 안정된 생활 속에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할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들의 바람을 창피하게 여기는가?

 

주변의 전원을 끄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신경을 끈 것이다. 일도 안 하고 일에 대한 얘기도 안 하고 일 걱정도 안 하는 시간을 가질 거라고 자기 자신과 가족들에게 약속하라. 전화기도 끄고 컴퓨터도 끄라. 당신뿐만 아니라 기계들도 한 번씩은 전원을 끈 상태가 필요하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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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우리는 자기 한계 내에서 하루하루 일하고 놀고 살아간다. 스스로를 한계 밖으로 밀어붙이는 건 더럭 겁이 나기도 하고 사실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행복의 가능성을 손수 밀어내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열망은 곧 우리의 가능성이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일하는 데 기쁨이 있는가? 우리는 '기쁨을 통한 힘'(KdF, Kraft durch Freude. 나치 독일에서 조직된 대규모 국가 관리 레저 기관. 노동자들의 여가 시간 및 활동 조직을 목적으로 함)이 나치에게 도용당했던 세상에 산다. 비슷한 고무책은 러시아, 중국, 동유럽의 공산주의 세대에게 매우 고된 일을 위임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러셀은 열심히 일한 뒤 얻는 기쁨, 즉 노동의 즐거움이 가혹한 폭군보다는 기업가들의 몫이었던 시대에 살았다. 그래서 일이나 노동에 대한 러셀의 시각은 현대인보다 더 긍정적이다.

 

러셀은 러시아의 젊은 노동자들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설명하는 글을 쓰기까지 했다. "서구권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 지성들은 자신의 대단한 능력에 걸맞은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불행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젊은 지성들은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러시아에서 가장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잠재력에 도달할 기회를 제공하고 우리 자신도 기회가 올 때마다 잠재력에 도전함으로써 우리의 행복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행복 총합을 증가시키자는 게 러셀이 말하는 핵심이다. 자기 능력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내던 한 명의 러셀 덕분에 우리는 기쁨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도, 중국,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죽어가거나 평생 글 읽는 법도 못 배운 채 살아가는 수천 명의 잠재적 러셀들이 있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뼈아픈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완벽한 치료책은 없지만 병을 진단하고 교정하는 힘은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서구의 젊은 남녀들 사이에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냉소주의는 안락함과 무력감의 합작품이다." 러셀의 말에 강한 반론이 제기된다 해도 어쨌든 이 말은 여전히 주효하다. 무력감은 성가신 게 없고 만사가 귀찮다는 뜻이고, 안락함은 염려하는 것도 신경 쓰는 것도 없다는 뜻이다.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 1999년부터 중국의 학생 수가 매년 30퍼센트씩 늘어나고 있다. 최근 6년 사이 대학 졸업생 수는 네 배가 되었다. 2010년에는 중국의 공학 및 이학 박사가 수적으로 미국을 앞질렀다. 이 이공계 박사들은 국가의 환경을 바꾸고 회사와 도시를 설립하고 있다. 러셀은 개인의 추진력에서 비롯되는 쉼 없는 노력과 변화를 만드는 능력이 결합돼 행복을 일궈낸다고 생각한다. "노력과 능력을 갖춘 그 사람은 냉소주의자가 아니라 개혁가가 된다."

 

서구인들은 자신의 잠재력이 어느 순간 극적으로 깨달아지기를 기대한다. 그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게다가 시험을 망친다고 부정을 저지르거나 결과를 위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자기 능력으로부터 총총히 멀어지고 있는 격이다. 우리 문화는 이런 서글픈 상황을 눈감아주는 데 전문가가 돼버렸다. 그리 낙심할 이유가 뭐냐며 우리 눈앞에 슬며시 텔레비전을 설치해뒀고 쇼핑, 정크푸드, 야동을 손에 꼭 쥐어주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냉소주의와 손쉬운 삶을 뿌리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우리 인생 전체에서 보다 큰 행복을 품는 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기 능력 이하의 성과를 내는 안일함에서 한 걸음씩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눈을 감아보라.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아래쪽으로 향하는 한쪽 길이 있다. 그 길 끝에 있는 당신은 지겨워 죽겠는데다 건강까지 해치는 일을 10년 동안 매일 반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위쪽으로 향하는 또 다른 길에는 여러 기회를 포착한다면 10년 내에 이룰 수 있는 당신 모습이 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과감하게 두 번째 길을 향해 첫발을 내딛어보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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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빅토리아 시대의 냉정하고 엄격한 방식으로 양육받았다고 보면 된다. 조부모의 사랑 없는 양육법은 러셀의 뇌리에 깊은 잔상으로 남았다. 그래서인지 러셀의 삶은 한평생 사랑을 찾아 헤매는 여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셀은 우리 역시 사랑을 찾는 모험을 그치지 말라고 전한다.

 

어떤 욕망은 인생을 계속 들썩들썩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하다.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내가 믿는 사랑이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동경했던 그런 사랑이 아니라, 모험을 불사하면서도 세심함을 갖춘 사랑"이라는 게 러셀의 지론이다.

 

전과 기록에다 두 번의 이혼 경력도 있는 반백의 58세 상류층 사내 러셀. 그는 전통적 기준에 맞는 사랑을 하기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로 도움이 되며 협력하겠다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부러 도망치지 않는 이상 외로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은 동행을 찾아 서로 격려하며 영감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함께 재미를 도모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혹시 사랑에 대한 낭만적 감상에 빠져서 산꼭대기에 홀로 앉아 아쉬움과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이 있는가? 속칭 이런 진상은 러셀이 생각한 귀감이 아니다. 당연히 우리가 본받을 표본도 아니어야 한다. 사랑은 세속적인 것들의 대안이 아니라, 속세의 모든 것이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효과 만점 촉매제다. 러셀의 표현대로 "사랑은 최고의 기쁨을 살찌워주기 때문에 귀히 여긴다". 그리고 "에고(자아)의 견고한 껍질을 부서뜨린다"는 이유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한다.

 

프로이트에게 에고(Ego)는 쾌락을 좇는 이드(Id, 인간의 정신 밑바닥에 있는 원시적, 본능적 요소)의 충동을 점검하고 조절하는 무의식의 일부였다. 러셀은 '행복의 정복'을 출판하기 7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 "에고는 이성과 상식이라 불리는 것을 대변한다. 열정이란 것을 품고 있는 이드와는 대조적이다." 에고는 우리를 문명화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게 순수한 기쁨을 주는 강력한 충동과 욕망을 통제하는 기능도 한다.

 

러셀은 사랑 찾기가 단순히 숭배할 누군가를 찾아내거나 당신에게 뭐든 사줄 사람을 찾거나 당신이 얼마나 멋진지 말해줄 대상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당신이 기쁨과 만족감을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이, 당신 역시 똑같이 기쁨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바로 사랑 찾기다.

 

<사인펠드>(Seinfeld, 미국 NBC에서 1990~98년에 방영한 코믹 시트콤.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가 직접 자신의 삶을 무대로 연기함)의 에피소드 하나를 들어보자. 주인공 제리 사인펠드가 지니 스타인먼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지니가 딱 제리 같은 사람이었던 탓에 둘은 처음 본 순간부터 죽이 잘 맞았다. 지니는 제리와 마찬가지로 시리얼과 슈퍼맨을 좋아한다. 말투도 서로 닮았고 즐겨 하는 농담도 똑같다. 제리는 이런 행운이 있나 싶을 만큼 지니를 만났다는 걸 경이로워했다. 둘은 곧 약혼을 한다. 그리고 다음 에피소드의 초반부에 제리 친구가 제리에게 약혼 이후로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

 

제리: 뭐, 딱히 얘기할 건 없어. [제리가 말하는 사이 플래시백으로 화면 전환] 한 한 달 전이었나? 같이 점심을 먹다가 뜬금없이 우리 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지...

 

제리, 지니: (동시에) 난 네가 싫어!

 

러셀의 말대로 우리는 영원히 지속될 사랑을 찾느라 혼자 너무 골몰하고 집착한다. 우리는 짝을 찾고 있는 것이지, 공통의 경험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확률을 가늠하는 게 아니다. 진기한 일이지만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러셀은 "사랑이 최고의 상태에 오를 때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하마터면 알려지지 않을 뻔한 가치가 이때 나타나는 법"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니 부디 사랑을 찾되, 눈앞의 현실이 아닌 미래의 모험에 대해 생각하라.

 

당신에게 소중한 존재인 누군가를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보라. 침실 안에서든 밖에서든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을 온갖 행동을 하면서 하염없이 행복하지 않았던가? 지금이 바로 그때의 모험심에 다시 불을 붙일 순간이다. 러셀이 한 일을 우리라고 못하겠는가!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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